eve - 지옥의 징조
7장
Rumor

소문

가리온의 일행이 도착한 엘타는, 트리에스테 북쪽 모이라이 동부의 항구 도시다. 본래는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작은 어촌이었으나, 페니키와의 항로가 개설되면서 새롭게 발전하였다. 카시미르 산맥을 기점으로 남의 페니키와 북의 엘타가 물자 운송을 위한 새로운 수단이 된 것이었다. 바다라고 카론이 위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컴컴한 산맥보다는 바다길을 선호했다. 특히 바다의 어부나 선원, 항해사들은 신격화된 비나엘르 파라이보다 파도의 지배자 론도우를 더 숭배했다. 일반 고래보다 크게는 세 배나 큰 몸집을 가졌다고 하는 론도우는 해저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위협적인 신이기도 하지만 인간들을 괴롭히기 보다는 해수에 출몰하는 이계의 괴물들을 휩쓸어가기 때문에, 바다의 수호자이며 파도의 지배자로 칭송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금보다도 고래의 기름을 더 최고로 치는 엘타의 사람들은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트리에스테 대륙에 인카르라는 단일 종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론도우를 유일신으로서 숭배했고, 카론보다도 숲 속의 은둔자 반저를 두려워했다. 인카르에서는 이러한 엘타의 관습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불의 사슬과 바다에 가려져 교단의 힘이 닿기 힘든 지역적 특성도 있거니와 엘타라는 도시 자체가 타 지역에 비해 부유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인카르 교단과 엘타는 보이지 않는 선에서 서로 건드리지 않았고, 인카르 교단의 미움을 받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항구 도시 엘타로 흘러 들어 왔다.

복수의 빙곡, 크레스포, 불의 사슬에서 데카론들에게 공격을 받았던 가리온도 마치 인카르 교단의 미움을 받아 쫓겨온 것처럼, 엘타로 들어왔다. 아니, 가리온뿐 아니라 엘타에 들어오면 모두 그렇게 변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엘타로 진입했을 때, 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바다 냄새가 시원하게 느껴졌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인카르 교단의 영향을 제일 덜 받는다는, 부유한 항구 도시 엘타는 거무티티 했다.

"전부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군."

그랬다. 모자로 가리거나, 두건으로 가리거나, 모두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엘타는 이중적이지."

헤이치 페드론이 엘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인카르 교단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고 있지만, 치안은 불안정해."

"뭐, 그거야 어디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계의 생명체들이 낮밤을 불문하고 길길이 날뛰고 있는데 어디라고 안전하겠어?"

룸바르트가 반박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차원이 다르네. 엘타를 괴롭히는 것은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기꾼들과 범죄자들이야."

헤이치 페드론은 벽을 가르쳤다. 수많은 현상금 벽보들이 팔락였다. 새로 붙인 벽보 밑에는 예전에 붙인 누런 벽보들이 여러 겹이었다.

“그럼 이 도시에는 데카론이 없나?”

파그노가 모두에게 물었다.

“둘러봐도, 우리처럼 데카론임이 티 나는 사람이 없어.”

“무슨 소리야. 저기들 있는데.”

잔바크 그레이가 가리킨 곳에는 정말 데카론 무리가 뭉쳐 있었다. 새들이 가득한 엘타의 광장이었다.

“저기, 집들 있는 쪽이랑 너무 틀린 데?”

놀란 파그노에게, 헤이치 페드론이 생각을 밝혔다.

“엘타는 부자 도시야. 잇속에 밝지. 데카론의 지원금을 타낼 생각일 거야. 데카론들이 여기에 온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가 봐요. 우리도 데카론이잖아요.”

시리엘 아즈가 밝게 웃으며 데카론 무리가 있는 곳으로 앞장섰다. 일행들은 시리엘 아즈의 뒤로 따라갔다.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과 낯설음이 얼굴을 상기시켰다. 가리온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데카론들은 둥글게 모여 있었다. 그 중심에는 검은 망토를 입은 사람이 있었다. 트리에스테 대륙을 여행하는 누구나 알고 있는 옷차림, 대륙의 순례자 요드였다. 사람들을 요드 하나를 둘러 싸고 웅성거렸다. 요드가 있는 곳에는 으레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가리온의 일행은 데카론들 틈에 끼었고, 어느새 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파그노와 잔바크 그레이는 무기를 고치러 상점에 갔고, 칸도 그들을 따라갔다.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는 사람들 토론에 참여하는 모습이었다. 룸바르트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가끔 토론에 끼어들기도 했다. 에바는 화살을 수리하기로 했고, 캄비라 바투는 바기족이라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시에나와 쿠리오는 괜히 옆에 있다가 덩달아 갇혀버렸다. 타마라는 홀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리온은 슬쩍 인파에서 벗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데카론들이 의심스럽게만 보이던 차에 후련했다.

“항구 쪽은 어디지?”

가리온은 주위를 살피며 바다를 향해 걸었다. 배를 구할 셈이었다. 바라트까지는 육로 보다는 배로 가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좁고 축축한 구불구불한 길로 가리온이 발걸음을 재촉하자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가고 있나 보군.”

일반적인 남자 키보다 약간 클 것 같은 작은 건물들 사이를 슥슥 지나쳤다. 바다에서 불어 올 해풍에 대비한 듯, 지붕은 낮았고, 건물들은 붙어 있었다. 멀리에는 금빛으로 높은 건물도 있었지만, 가리온이 가는 길의 건물들은 허름했다. 바다 습기에 벽이 갈라지지 않은 건물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가리온은 상관없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이라 인적이 드물다는 게 마음이 편했다.

“이대로 배를 구해서 혼자 떠나자.”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가리온 뒤에서 훼방꾼이 나타났다.

“바라트는 혼자 가기에는 위험한 곳입니다.”

가리온은 뜨끔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산맥을 넘는 것보다는 수월하겠지요.”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는 방금 전 보았던 요드였다. 그는 상냥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지만, 가리온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리온은 검을 잡았다.

“오오. 저는 적이 아닙니다. 자. 보십시오. 제가 이계 생명체처럼 생겼습니까?”

요드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가리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역효과만 낼 뿐이었다. 가리온은 코웃음을 치며 눈을 반짝였다.

“내 적은 이계만이 아니라서.”

“뭐, 그러면 이것으로 믿어주십시오.”

사내는 망토를 뒤적거리더니, 인카르 교단의 문양이 새겨진 요드의 표식을 꺼냈다.

“정식으로 인사하지요. 루이입니다.”

가리온은 요드가 내밀은 표식이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믿지 않았다. 진짜 데카론들이 가리온에게 검을 디밀었고, 죽이려 했다. 가리온은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나를 뒤에서 부른 목적이 뭐냐?”

엘타의 요드 루이는 정중히 대답했다.

“비나엘르 파라이님이 보내셨습니다.”

그 순간 가리온은 얼어버렸다.

요드들은 전부 그런지, 루이는 천천히 가리온에게 설명했다. 가리온은 루이가 하는 설명에 적절히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비나엘르 파라이님은 가리온님을 계속 주시하고 계셨습니다. 로아에서 아발론으로 향하실 때는 상당히 놀라셨습니다.”

“그것은 델카도르가 벌인 일이네.”

“비나엘르 파라이님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델카도르님에게 보내신 것은, 백기사단의 배경에 대해 알게 하시려고 함인데 델카도르님은 가리온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무척 아쉬워하셨습니다.”

“백기사단에 대해서는 복수의 빙곡에서 들었네. 백기사단의 바론을 직접 만났지.”

“그리고. 그 때부터 데카론의 공격이 시작되었지요?”

가리온은 루이를 노려보았다.

‘이 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을까. 믿어도 될만한 자인가?’

“안심하십시오. 모든 것이 델카도르님이 꾸민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나엘르 파라이님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가리온님 설마 비나엘르 파라이님을 의심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루이는 상냥했다. 마치 남자 타마라처럼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왜 나를 찾아왔지? 비나엘르 파라이님이 뭐라고 하시던가? 이제 와서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도와주시려는 건가?”

가리온의 말투가 자기도 모르게 비꼬아졌다.

“일단 이것을 받으십시오. 배를 구하시려면 딜이 필요하실 것입니다.”

요드 루이는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하나 끌러 가리온에게 넘겼다.

“비나엘르 파라이님은 요드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리온님을 보거든 바라트에 누트 샤인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라고 말입니다.”

“누트 샤인이?”

“누트 샤인은 알로켄족이 트리에스테 대륙을 다스리던 시절,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는 바라트에서 카론을 불러낼 의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리온의 눈이 끝을 모를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바루나의 예언이 머리 속에 스쳐갔다.

‘중간자가 필요하다고 했어!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두 명이! 그런데, 어떻게 누트 샤인이 카론을 불러내는! 나머지 한 명이 누트 샤인인가?’

혼란스러웠다. 가리온은 바라트로 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누트 샤인이 이미 거기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역시.”

가리온이 하려던 나머지 말을 루이가 받아 쳤다.

“아무래도 바라트에서 제 2의 그랜드 폴이 일어나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듀스 마블은…!”

“누트 샤인. 그가 바라트에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가리온의 머리 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휘몰아쳤다. 만약 누트 샤인이 나머지 중간자라면, 가리온이 바라트로 가는 순간 카론의 의식이 시작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라트에서 의식이 시작될 것이라면, 듀스 마블 또한 이 사실을 알고 바라트로 향했을 것이다. 가리온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내가… 어쩌면 되지?”

“영웅의 길은 영웅이 선택하는 법이지만, 일단 바라트로 갈 배를 구하는 것을 도와드리지요.”

루이는 싱긋 웃었다.

루이는 정말로 친절하게 가리온이 배를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정말 고맙네.”

가리온은 배를 보며 말했다. 배는 곳곳이 검게 슬어 오래되어 보였고, 그리 크지 않아 많은 인원이 탈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가리온은 일부러 이런 배를 골랐다. 이번만큼은 일행을 두고 혼자 갈 생각이었다. 누트 샤인이 중간자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함께 다니고 있는 일행 중에 또 다른 중간자가 있는지도 몰랐다. 뭐가 되었든 위험한 일이었다.

“별말씀을요. 트리에스테 대륙을 위한 일인데, 도와 드려야지요. 그런데 말씀하신 딜은?”

“아. 그래. 이거면 되겠는가?”

가리온은 루이에게 받은 주머니를 통째로 어부에게 넘겼다. 어부의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는데, 가리온이 주머니를 내밀자 상처가 찢어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부는 주머니 속 딜을 세어 보며 계속 말했다.

“오늘부터 이 삼일 정도는 태풍이 불 것 날씨입니다. 뭐, 죽고 싶지 않으면 그 후에 출발하십시오. 전에도 이런 날씨에 우겨서 출발한 바기족 하나가 있었는데, 죽었는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바기족?”

가리온의 귀에 바기,라는 말이 거슬렸다.

“네. 아주 작았는데. 제 무릎 살짝 넘을까 말까 한 키로, 바라트로 가겠다고 어찌나 우기던지. 뭐, 돈은 두둑하게 주기는 했는데 떠나고 바로 다음날부터 태풍이 와서 다들 죽었으려니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하러 바라트까지나 간다고. 쯧.”

“누트 샤인이다….”

“네?”

“아니. 고맙네.”

가리온은 루이를 보았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전한 소식은 사실이었다.

“가리온! 여기 있었나?”

룸바르트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일행들이었다. 어느 새 다시 뭉쳐서 가리온을 찾았던 모양이었다. 가리온은 혼자 중얼거렸다.

“보기보다 끈덕지군.”
“뭐 하는 거야? 배를 구했어?”

가리온은 대답하지 않고, 이들을 어떻게 돌려보낼까 궁리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을 들었네.”

“소문?”

갑자기 루이가 끼어들었다.

“엘타는 소문이 많은 곳이지요.”

룸바르트는 잠깐 루이를 보았다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듀스 마블이 제노아 근처에 있는 성에 나타났다고 하네.”

“뭐?”

가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룸바르트의 팔을 꽉 붙잡았다. 듀스 마블이 있는 곳이라면,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도 함께 있을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실인가?”

“일단은. 소문이라네. 그런 얘기가 돌고 있어. 헬리시타에서 온 자가 떠들더군. 하지만 다들 쉽게 믿고 있지 않아.”

룸바르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루이가 다시 한 번 끼어들었다.

“가리온님.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은, 소문보다 주위를 신경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기를 든 데카론들이 가리온을 향해 몰려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