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bivalence - 타인과 적
4장
Throe

화합의 고통

비나엘르 파라이가 가라던 복수의 빙곡이 바로 코앞이었다. 그렇다면 크레스포도 멀지 않았을 것이었다. 가리온은 아무 주저함도 없이 곧장 가려고 했다.

그런데 시에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시에나의 작은 얼굴에서 반짝이는 눈빛이 가리온을 보고 있었다.

의심할 수도 없었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칼과 눈 속에서 더 새하얀 얼굴은 시에나가 확실했다.

“아….”

가리온은 검을 멈추고 멍하니 시에나를 보았다.

달리 어떤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시에나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죄의식이 그 날, 가리온은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를 위해서 검을 들었고 시에나는 듀스 마블의 편에 섰었다.

그 당시에도 가리온은 시에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너무 늦게 알아보았다. 그 때 가리온의 검은 이미 시에나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때문에 가리온은 시에나가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시에나는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넋이 나갔군.”

“룸바르트!”

“에바 쪽이 훨씬 예쁜데 말이야.”

에바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리온의 표정을 살폈다.

저 편에서는 잔바크 그레이와 칸이 아직도 카타스트로프와 상대하고 있는데 가리온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이런 행동은 가리온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에바는 생각했다.

‘저 여자가 누구길래, 저렇게 동요하지?’

에바는 사죄의식의 날 가리온과 함께 헬리시타에 갔었지만 시에나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날, 에바의 어머니이자 가리온의 어머니인 디에네 비노쉬가 숨을 거두었다.

예전의 그 날은 에바에게는 디에네 비노쉬와 세지타, 그리고 가리온의 일로 너무도 벅찬 날이었다.

‘바기족과 함께 있는 인간이라…. 희한하네.’

에바가 시에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지금의 모습뿐이었다.

그러나 룸바르트는 알고 있었다.

시에나가 듀스 마블의 편에 섰었던 인카르의 전령이었다는 것과 슈마트라 초이를 구하러 온 가리온과 싸웠던 사실, 헤이치 페드론과 시에나의 관계까지도.

그리고 룸바르트는 그 어떤 사실보다 헤이치 페드론과 시에나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기분이 어때? 저쪽은 인카르의 개에서, 바기족의 개로 성향을 바꾼 모양인데?”

룸바르트는 헤이치 페드론을 향해 물었다.

뒤쪽에 빠져 있었던 헤이치 페드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 시에나의 음성이 들렸다.

“…. 가리온? ….”

목소리는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생명의 은인보다 적의 이름을 먼저 부르다니! 정말 어쩔 수가 없군! 이래서야 원! 역시 개는 구해줘 봐야 소용이 없다니까.”

“그만.”

헤이치 페드론은 룸바르트의 비아냥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만해. 룸바르트.”

“그래요. 룸바르트.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타마라까지 왜 그래?”

타마라는 미소 지었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 가야 하는 일행이에요.”

“뭐?”

시에나가 가리온의 이름을 부른 후, 가리온 쪽이 소란스러워진 것과 마찬가지로 시에나 쪽도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아는 자들이야?”

시에나 곁에 바싹 붙어 있던 캄비라 바투는 깜짝 놀라 물었다.

저 편이 자칫 싸움을 걸어올까 전투 태세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 네.”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는 얼굴을 따라 눈물 자국이 새로 생겼다.

“알아요…. 아는 사람이에요….”

시에나는 가리온이 멀리서 카타스트로프와 아이슈마를 상대하는 것을 내내 지켜 보았다. 처음에는 휘몰아치는 눈발이 주위를 가리듯 막막했지만, 점점 선명해졌다.

노라크 동굴에서 헬리시타로 돌아간 이후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것은 가리온이었다.

“우리는 아레스 숲에서 처음 만났어요…. 함께 그리폰을 타고 노라크 동굴로 갔어요….”

지난날에 대한 생각이 홍수처럼 밀려와서 시에나의 눈물이 되었다.

시에나는 천천히 가리온과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눈은 가리온에게 고정된 그대로였다.

“용암 속에 떨어지는 내 손을 잡아주었죠…. 내 손을 잡고 끌어주었어요. 자기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경에서 나를 살리려고…. 내가 안쓰러워서, 나를 살리려고. 자기는 위험하면서 나를 구해주었어요. 하지만 나는 아무런 도움도 못되었어요.”

시에나는 울먹이며, 때론 눈물을 훔치며, 또 때로는 두 손을 꼭 부여잡으며 이야기해 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를 혼자 두고…. 혼자 두고. 헬리시타로 돌아갔어요…. 거짓말처럼 나는 아무 기억이 나질 않았어요. 결국 우리는…. 사죄의식이 있던 날…. 다시 만났어요… 아버지를 구하려고 그가 왔는데…. 나는 막아 섰어요. 우리는….”

시에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

쿠리오는 시에나가 상처가 회복된 후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들었다. 시에나가 눈물을 흘리며 설명하는 사람과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굉장히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느낌은 쿠리오만의 것이 아니었다.

캄비라 바투 역시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쿠리오와 같은 따뜻한 이해를, 캄비라 바투는 할 수 없었다.

헬리시타에서 세그날레의 치료를 받은 시에나를 캄비라 바투는 자덴으로 데려갔다.

세그날레가 시에나를 자덴으로 데려가 쉬게 하라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캄비라 바투는 그런 이야기가 없어도 그럴 생각이었다. 설사 세그날레가 다른 곳으로 데려가라고 했어도 자덴으로 데려갔을 것이었다.

캄비라 바투에게 시에나 오틴은 놓치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그리폰을 타고 함께 세상을 날고 싶은 여자였다.

캄비라 바투는 시에나를 데리고 자덴으로 돌아가 극진히 대했다.

무엇도 아깝지 않았다. 좋다는 음식이며 약이며, 옷과 장신구들을 줄줄이 시에나에게 보냈다. 혹시라도 회복에 방해가 될까 시에나가 완쾌되기 전까지 근처에 가지도 않았다.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시에나가 방에서 나와 캄비라 바투에게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고맙습니다.”

그 때부터 캄비라 바투는 이 말을 수백, 수천 번 들었다.

세그날레와의 약속대로 크레스포로 떠나야 하는 시에나가 안타까워 족장 자리를 대리에게 넘기고 따라 나섰을 때도 고맙다는 한 마디뿐이었다.

시에나의 고맙다는 말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캄비라 바투는 그 말이 싫었다. 시에나가 자신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시에나는 그리 대단해 보이는 것 같지도 않은 평범한 모습의 기사를 향해 눈물까지 흘리면서 이야기를 쏟아냈다.

“가리온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마지막 눈물을 닦은 시에나는 조용히 말했다.

“안돼!”

캄비라 바투는 시에나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의 일을 정리하고 싶어요.”
“우리! 우리! 우리! 자꾸 우리라고 하지마!”

캄비라 바투의 거친 호흡 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시에나는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안돼.”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그렇지만.”

“안 된다니까!”

캄비라 바투는 시에나를 노려보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시에나에게만큼은 항상 상냥하기만 했던 캄비라 바투였기에 바기족 전사들과 쿠리오, 모두가 놀랐다. 시에나마저도 섣불리 다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캄비라 바투는 입을 꽉 물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저들은 적이다.”

시에나는 멍하니 캄비라 바투를 보았다.

“지금 바로 공격한다.”

바기족 전사들과 쿠리오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전 시에나가 눈물을 흘리며 하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그러자 캄비라 바투가 다시 외쳤다.

“지금 바로 공격한다!”

“하… 하지만.”

캄비라 바투를 전적으로 믿고 이곳까지 따라 온 바기족 전사들도 무언가 찝찝해 선뜻 나서지 않으려 했다.

“저들은 적이란 말이다!”

“적이 아니에요!”

다시 용기를 낸 시에나가 반박했다.

“적이야!”

“아니에요!”

“내가 적이라면! 적이야!”

눈이 벌개진 캄비라 바투가 시에나를 향해 고함쳤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크고 엄해서 바기족 전사들도 움찔했다.

“….”

시에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표정은 그대로 굳어졌다.

“저들은 적이다!”

캄비라 바투는 자신의 전사들에게 호령했다.

“적들을 섬멸하라!”

캄비라 바투는 더 참지 못하고 가리온을 향해 달려 나갔다.

캄비라 바투와 함께 칼바람이 흩날렸고 그 뒤로 바기족 전사들이 약간은 주춤거리는 모양으로 따라 나갔다.

가리온은 진영을 돌아봤다.

에바와 룸바르트, 타마라, 잔바크 그레이, 칸, 파그노, 헤이치 페드론, 시리엘.

눈안개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바기족에 비해 확실히 열세였다.

“싸울 수 있겠나?”

“지금까지 싸워왔잖아?”

룸바르트가 가리온의 말을 받아 쳤다.

“….”

“뺏긴 정신이나 찾지 그래?”

“….”

“살아서 보자고.”

가리온은 룸바르트에게 멋쩍은 웃음을 날리고 적의 숫자를 헤아렸다.

가리온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는 바기족은 열 셋이었다.

시에나와 인간으로 보이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라면 아까 네가 했던 말은 어떻게 되는 거야?”

룸바르트는 슬며시 타마라에게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타마라는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화합에는 고통이 따르죠.”

“그래?”

룸바르트는 타마라를 따라 웃다가 가리온을 얼핏 보았다.

“그럴까….”

룸바르트의 작은 혼잣말은 바기족의 목소리에 흩어졌다.
“적들을 섬멸하라! 나아가라! 바기족의 전사들이여!”

“우와아아!”

바기족 전사들의 함성이 설원에 메아리 쳤다. 전사들의 굵직한 두 다리가 눈밭을 갈랐다. 차갑게 얼어버린 캄비라 바투의 쇠 날이 예리한 유리처럼 빛났다.

“가자!”

쿵쿵, 눈사태가 일어날 듯 빙곡이 부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