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bivalence - 타인과 적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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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과거

가리온은 귀신에 홀린 듯 백기사단을 향해 걸어갔다.

“드디어….”

오스카는 웃으며 바론에게 말을 걸었다.

“저 친구, 왜 저렇게 우리한테 오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하기는 진실을 알았으면 두려워서 못 왔을 테지.”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던 자라네.”

“그래. 알아. 때가 왔지.”

오스카의 표정도 바론처럼 싸늘해졌다.

가리온이 점점 가까워지자 바론이 외쳤다.

“나는 바론, 백기사단 뷰라보 랜더님을 호위하는 호위병이오.”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한 손가락도 안 되는 숫자였지만, 그래도 바론이 그 중 우두머리로 보였다. 그런데 고작 호위병이라는 소리에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는 어안이 벙벙했다.

“… 숨겨진 기사들이 더 있나?”

“괜찮을까요? ….”

“그래도 조금이라도 머릿수가 많은 게 좋겠지.”

뒤에서 중얼거리는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을 두고 대답하듯 바론이 말했다.

“우리는 전설의 운도 마조키에의 후예라오.”

“….”

“뒤의 두 명이 당신을 도와주라는데….”

가리온은 말을 듣는지 듣지 않는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백기사단은 여기, 네 명뿐이오.”

“….”

“괜찮겠소?”

바론과 오스카, 잭슨과 앤드류, 백기사단은 가리온의 대답을 기다렸다.

가리온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나는 가리온 초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소.”

가리온은 다시 입을 다물었고, 바론과 오스카는 미소를 지었다.

칸은 순백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떻게 싸울지 매우 궁금했다.

고작 네 명의 사람이 어떻게 도울지 너무도 궁금했다.

그러나 칸은 파그노 곁에 남았다.

파그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캄비라 바투가 미웠고, 오빠에게 미안해서였다.

“미안해…. 내가 지켜줘야 했는데….”

칸은 파그노의 손을 부여잡으며 살얼음에 뿌연 창 밖을 응시했다.

모두가 돌아와주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가자!”
“우와아아!“

백기사단은 두 눈을 불끈 뜨고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데카론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곧 지친 가리온의 일행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은 백기사단의 위명을 듣지 못하였느냐!”

바론의 붉은 검이 데카론들 사이에서 화려하게 춤을 추었다.

검은 마치 붉은 꽃 같았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서 동그랗게 피가 그려졌고, 그것은 꽃잎이 되었다. 그렇게 꽃잎이 하나 하나씩, 데카론들이 한 명 한 명씩 붉게 흩날렸다.

“이곳에 뷰라보 랜더님이 잠들어 계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오스카는 데카론 하나를 찌르고 서둘러 몸을 돌려 다른 팔로 검을 빼 앞으로 날렸다.

바론 못지 않게 화려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순백의 갑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들은 지나간 자리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다시 돌아올 필요도 없었다.

잭슨과 앤드류가 알아서 몰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바론이나 오스카만큼 검술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 축적해온 기본기로 놀라운 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위협하는 검술로 주위를 둘러 서있던 데카론들을 한 곳으로 모았고, 바론과 오스카는 모아진 데카론들을 한꺼번에 처리했다.

“굉장한데….”

룸바르트는 단 네 명이 데카론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또한 소모적이지.”

타마라가 즐거운 듯 받아 쳤다.

“수에서 밀리니까, 더 화려하게, 빠르게 공격할 수 밖에.”

“그럼 서둘러 도와야겠군요.”

시에나는 방어막을 거두고 공격할 준비를 했다.

에바는 여전히 침착한 시에나가 놀라웠다.

처음 보았을 때는 가리온에게 그토록 슬픈 눈을 보이더니, 지금은 오로지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 가리온.’

에바는 가리온을 보았다.

가리온은 이미 앞에서 백기사단과 어울려 싸우고 있었다.

에바는 심호흡을 깊게 했다.

‘지금 내가 싸우지 않으면, 저 여자에게 지는 거야.’

에바의 눈에 가리온과 시에나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깊게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도 가리온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래. 싸우자. 끝까지.’

마음이 평안해졌다.

싸움에 집중했다.

빙곡의 해가 기울어질 무렵, 적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바론은 눈빛이 강한 사람이었다.

어둑어둑한 요새 안에서도 그의 눈은 야수처럼 빛났다.

그는 가리온의 눈을 바로 보며 이야기했다.

“청기사단장이라며?”

“그렇습니다.”

가리온 역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숨길 것은 없었고, 진실을 알고 싶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님이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래…. 비나엘르 파라이가 보냈군….”

바론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술잔을 앞뒤로 흔들었다.

“자네는 인카르 교단 아래에서 데카론에 동참하였고 또 그로부터 많은 공적을 세웠겠지.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공적은 중요치 않네.”

바론은 술잔을 허름한 탁자에 내려놓고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인카르 교단과, 아니 청기사단과 함께 갈 생각이 없네.”

“그렇지만 트리에스테 대륙은 지금 위험합니다.”

“왜?”

“이계의 오염도 그렇고, 카론이 부활할 수도 있습니다.”

가리온은 말 끝에서 듀스 마블과 슈마트라 초이를 떠올렸다.

“그렇지…. 트리에스테에서 가장 두렵고 제거해야 할 적은 카론이지.”

바론의 눈이 창 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언젠가 카론이 부활하는 날에는 뷰라보 랜더님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우리와 함께 싸울 것이네. 그러니 우리는 청기사단과 같이 걷지 않을 것이네. 우리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아.”

“비나엘르 파라이님은 백기사단이 도와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리온은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또한 자신도 낮의 일로 인카르 교단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때문에 바론의 다음 이야기를 천천히 기다릴 수 있었다.

“오래 전, 우리 백기사단이 있던 곳은 연두빛깔의 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복수의 빙곡이 아니었네. 백기사단은 기사들의 심장, 제노아에 있었네. 제노아 제일의 기사단이 바로 백기사단이었지. 백기사단이야말로 정통이었네. 운도 마조키에의 후예들!”

바론은 스스로에게 건배했다.

“아이언 테라클이 운도 마조키에의 후예랍시고 떠들어댈 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지. 우리는 절대로 인카르에 타협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 당시, 그러니까 그랜드 폴이 끝나자 인카르 교단은 청기사단과 손을 잡고 세력을 키웠지. 청기사단은 신예 검신 아모르 쥬디어스가 수장이었네. 백기사단의 수장은 바로 뷰라보 랜더님이었지.”

바론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가리온은 매우 놀랐고, 얼굴에 그 놀람이 드러났다.

“다만 그랜드 폴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에는 모두의 의견이 맞아 떨어졌지. 그리고 우리는 이곳으로 왔네. 크레스포에 오염이 퍼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것 같네. 백기사단이 선두에 섰고, 청기사단은 후발대였지. 뷰라보 랜더님은 용맹하게 앞장섰다네. 운도 마조키에의 후예들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지. 수많은 이계의 생명체들이 우리 앞에서 피를 뿌렸고 동강나 버렸네.”

바론의 말이 빨라졌다.

“그러나 뒤를 주의하지 못했어. 우리는 좁은 빙곡에서 어느 새 포위되고 말았네. 수많은 기사들을 잃었지. 뷰라보 랜더님은, 백기사단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청기사단이 오기만을 기다렸네.”

바론의 말이 잠시 끊겼다. 그의 눈이 붉어지는 듯 했다.

“……. 그들이 온다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

“청기사단은 오지 않았네.”

가리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기사단만이. 크레스포로 가는 이 협곡에서 갇혀버린 거야.”

바론의 눈이 다시 바늘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가리온은 눈빛을 피할 수 없었고 다른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곧 얼마 남지 않았던 백기사단의 기사들은 한 명씩 얼어붙기 시작했지. 모두가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심장이 차갑고 또 차가워져서. 대부분이 죽어버렸어. 살아남은 기사가 열 손가락을 세자 뷰라보 랜더님은 우리들을 이끌고 빙곡을 탐사하기 시작했지. 그것은 추위를 견디는 것만큼이나 더 어려운 일이었네.”

“….”

“자네도 알겠지만, 이 빙곡이란 곳은 오염이 될 대로 된 곳이라서 저 밑의 평야에서는 볼 수 없는 사악한 무리들이 즐비하지. 지금 여기 요새를 겨우 찾아냈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네. 사악한 무리들에 쫓겨 결국 나와 오스카만이 남았지. 그리고. 뷰라보 랜더님은 스스로를 봉인하셨네….”

가리온은 바론을 더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가 신뢰할만한 자만을 찾는 이유를 알겠나? 자네는 데카론의 영웅이지만 우리는 인카르 교단을 믿을 수 없네. 제노아의 기운을 타고 쥬토의 가호를 함께 받고 있을 청기사단도 또한 믿을 수 없네.”

바론은 말을 마치고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우리는 자네를 구했네.”

가리온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론의 마지막 말은 가리온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