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Testament - 새로운 약속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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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이 가득한 그 눈길을 룸바르트는 어쩐지 받아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룸바르트 자신에게 매달렸던 그 어떤 여자들의 눈길도 차갑게 무시할 수 있었는데, 에바에게는 이상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무언가 애틋한 감정이 룸바르트에게 떠오르려는 그 순간, 에바가 룸바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어째서죠? 왜 그랬죠? 당신 누구예요? 여기는 왜 왔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그 모습에 룸바르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가리온에게 왜 그랬냐구요! 대답해요, 어서!"

에바는 룸바르트의 멱살을 잡아 마구 당기고 흔들었다.

룸바르트는 에바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러지 마. 어차피 가리온은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룸바르트의 말은 정말로 치욕적이었다.

에바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성큼 다가가 손을 치켜들었다.

“자, 때려.”

룸바르트는 에바를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라면 맞아주지. 대신 너도 내게 봉사해야 해.”
“뭐야!”

“뭐기는. 알잖아? 나는 매일 밤 기다리고 있다구.”

“이! 저질스러운!”

“너의 탐스러운 엉덩이가 더 저질스럽지.”

"뭐라구!"

"에바. 참아요."

룸바르트는 그칠 줄을 몰랐다. 수치심이 머리 끝까지 오른 에바를 말린 것은 칸이었다.

“당신 대체 왜 이래요? 좋아서 데카론에 참여한 것 아닌가요?”

에바는 이빨을 가는 늑대처럼 으르렁대는 룸바르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고? 왜. 왜 그러냐고?”

룸바르트는 웃음이 나왔다.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피해자의 아들과 가해자의 아들이 대면했다는 지금 이 상황에서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자신이 어떤 슬픔을 겪어야 했는지 이제서야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일 수도 있었다.

“가리온.”

룸바르트는 가리온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리온 초이.”

가리온은 지금부터 룸바르트가 하려는 말이 매우 심상치 않은 것임을 눈치챘다.

“그리고…. 초이. 슈마트라 초이.”

헤이치 페드론은 룸바르트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것은 룸바르트의 권리 같기도 했다.

“네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는 헬리시타에서 두 사람을 죽였다. 제노아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다이몽 루세와”

룸바르트는 숨을 들이켰다.

“인카르의 서기관인 티몬 겐조.”

“설마!”

잔바크 그레이는 입을 쩍 벌렸다.

“내 이름은.”

룸바르트는 잔바크 그레이에게 찡긋 눈웃음을 보냈다.

“룸바르트.”

가리온은 다음 말을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룸바르트의 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룸바르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에 대해서도, 얇은 종이가 물에 닿아 한꺼번에 젖어버리듯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잔인한 룸바르트는 이 순간을 즐겼다.

“룸바르트 겐조다.”

가리온의 눈이 꿈틀거렸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다른 세상이 엄청난 물살로 가리온을 향해 덮쳐오는 것 같았다. 가리온이 받아들이려 했던 진실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사죄의식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가리온은 최대한 침착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것이 죄인의 아들이 되어버린 치욕감에서 나온 행동인지, 슈마트라 초이의 파멸에 분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불쌍한 가리온.”

룸바르트는 환한 얼굴로 가리온을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자네, 나와 친구 하겠나? 응? 같이 저승길로 가는 건 어때?”

룸바르트는 뒤이어 폭소를 터뜨렸다.

너무 웃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게 진실을 폭로한 뒤의 기쁨과 승리의 미소인지,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룸바르트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동정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저런. 같은 편끼리 싸우면 안 되죠.”

달콤한 목소리와 향기가 다가왔다.

“우욱!”

그러나 제일 민감한 신경을 가진 에바는 오히려 고통스러워 했다.

“아, 세지타족도 있었군요.”

에바는 주위를 둘러 보다가 자신의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손톱이 맞닿은 곳에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세그날레?”

“미안해요. 사실, 당신들한테는 이러면 안 되는데.”

감미로운 목소리가 가시줄기처럼 날카롭게 박혔다.

“피는 너무 맛있잖아요?”

“으읏.”

가리온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리온의 고통은 손끝까지 전해져 어느 새 광검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역시. 맞군.’

타마라는 힘을 거두고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다.

“알골과 한 판 하셨군요. 이상하다… 녀석이 나올 곳이 아닌데…. 카론의 힘이 그만큼 더 강해진 건가…. 흐음….”

타마라는 일행을 향해 걸었다. 아니, 가리온을 향해 걸었다. 생각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서 황금색 눈으로 가리온을 훑었다.

“뭐 하려는 거야!”

에바는 어쩐지 타마라를 막고 싶었다.

‘가리온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거야!’

에바는 화살을 들어 조준했다.

세그날레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전혀 빈틈이 없었다.

‘예감이 좋지 않아.’

에바가 나서자 잔바크 그레이와 칸도 곧 나설 태도를 취했다.

“아아. 이래서 여자들은 피곤하다니까요.”

타마라는 고개를 저었다. 긴 귀가 얇게 흔들렸다.

‘귀가 급소일까?’

에바는 화살촉을 조금 더 올렸다.

“에바. 날 쏘지 말아요.”

세그날레는 천천히 싸늘하게 말했다.

“내 이름을?”

에바가 놀란 사이 타마라는 검은 손톱을 치켜 들었다.

에바와 잔바크 그레이, 칸, 그리고 헤이치 페드론까지 타마라에게 달려들려 할 때, 타마라가 말했다.

“구원.”

곧 가리온의 다리가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흠칫한 일행들에게 타마라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타마라, 아시다시피 세그날레예요. 몇 가지 간단한 마법과 치료를 구사할 수 있죠. 헤이치 페드론이나 시리엘 아즈 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대체 왜?”

에바는 가리온과 타마라를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타마라는 에바에게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나도 데카론에 참여하겠어요.”

가리온은 타마라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트리에스테 대륙의 암살자로 불리는 세그날레를 받아들이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다. 결국 가리온의 일행은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그 동안 절벽 사이로 몸을 감춘 룸바르트는 천으로 허리를 다시 둘둘 말았다. 풀어놓은 천에는 피와 고름이 꽃잎처럼 번져 있었다.

“으읏.”

“도와줄까요?”

룸바르트는 타마라를 노려보았다.

“대가는 나의 피인가?”

타마라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 피는 맛없어요.”

“그래?”

룸바르트는 허리를 더 세게 조였다. 허리에 분꽃처럼 솟은 상처들이 눌려 고통스러웠다.

“으읏.”

“오염된 피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룸바르트는 비밀을 들킨 고양이처럼 눈동자를 치켜 세웠다가 다시 내리깔았다.

“그래? 그럼 뭘 좋아하지?”

“당장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후유증은 더 커질 거예요.”

“…!”

“고통을 잠시만 참으면 된다고, 상처가 완전히 낫는 게 아니에요.”

“그럼 네가 치료해 줄 건가?”

“오염된 피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타마라가 다시 웃었다.

룸바르트는 턱을 씰룩였다.

타마라는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룸바르트가 헤이치 페드론에게 보여 준, 요정의 가루는 사실 완벽한 치료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해줄 뿐이었다.

얼굴과 팔 다리에는 나타나지 않아도, 복부 깊은 곳에서부터 룸바르트는 이미 소환술의 부작용에 중독되어 있었다.

“나를 데려가 준다고 약속하면, 치료를 도와주겠어요.”

룸바르트는 타마라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에바는 날 반대할 거예요. 가리온 같은 사람은 흔들리기 쉽죠. 하지만 당신은 내가 함께 갈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어요.”

“천만에. 사람 잘못 봤군. 난 돌아갈 거야.”

“아니, 당신은 돌아가지 않아요.”

타마라는 자신만만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에바가 당신을 붙잡으면, 당신은 돌아서지 못해요.”

룸바르트는 기가 막혔다.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는 말들에는 논리라는 것은 눈 씻고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더 그럴싸한 이유를 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에바가 예쁜 건 사실이지만, 예쁜 것만 쫓는 멍청한 남자는 아니라구.”

“당신은 에바 때문에 죽어요.”

룸바르트는 타마라를 노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