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Testament - 새로운 약속
3장
Testament

비나엘르 파라이의 약속

지난 여름부터 룸바르트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선 제노아의 새로운 집정관이 된 사촌 다이몽 루세와 아버지 티몬 겐조의 멈추지 않는 잔소리가 트리에스테 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 일로 사촌과 아버지를 죽인 슈마트라 초이의 사죄의식이 집행되었고, 최근에는 슈마트라 초이의 아내였던 디에네 비노쉬의 장례식이 있었다.

모든 일들은 룸바르트와 아주 밀접했고, 또 멀리 있었다.

룸바르트의 가족들이 죽어나갔지만 그 죽음의 결과는 룸바르트와는 전혀 상관없이 흘러갔다.

사죄의식으로 살인자를 처형하던 날, 헬리시타는 검은 연기에 휩싸여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시체들이 뒹굴었다. 그러더니 비나엘르 파라이가 나타나서 살인자의 아내였던 디에네 비노쉬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고 데카론을 주장했다.

결국 트리에스테의 여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비나엘르 파라이에 의해 지금까지의 모든 불상사의 원인은 카론이 전부 짊어졌다.

어느 새인가 티몬 겐조와, 다이몽 루세, 슈마트라 초이의 이야기는 쏙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룸바르트는 디에네 비노쉬의 연기가 하늘 높이 퍼질 무렵,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불우한 사건들에 자신이 휘말리는 일은 없으리라 스스로 믿고, 다짐하고, 위로했다.

“치료해주세요.”

하지만 현실은 룸바르트를 외면하지 않았다. 제발 조용히 살고 싶은 룸바르트를 끄집어 내어 시험대에 세웠다.

“이 사람, 가리온은 세지타에게 화살을 맞았어요.”

불행한 인연을 가진 살인자의 아들은, 기껏 잊으려 했더니 계단 아래 룸바르트의 발 밑에 나타났다. 온 몸에 못을 박아도 모자랄 그를 치료해달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자까지 데리고 말이다.

“못 봐주겠군.”

룸바르트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헤이치 페드론 선생님, 맞으시죠?”

룸바르트는 고개를 들어 자신 앞에 주어진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했다.

저 아름다운 여자와 원수의 아들은 지금 룸바르트의 마음이 어떤지 알 리가 없었다.

에바는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치료해주세요."

룸바르트는 그렇게 말하는 에바의 입술이 너무도 증오스러워서 뜯어 물고 싶을 지경이었다.

"알아 들었소."

룸바르트는 드디어 한 마디 뗄 수가 있었다.

에바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헤이치 페드론이 아니오.”

에바의 얼굴에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지나갔다.

“여기가 헤이치 페드론 선생님 댁 아닌가요?”

“그건 맞소.”

“그럼 당신은 누구죠? 왜 여기 있죠?”

이번에는 에바의 얼굴이 심각하게 찌그러졌다. 다양하게도 변하는 에바의 표정은 룸바르트를 궁지에 몰았다.

“그건….”
“제자겠죠. 에바. 그를 다그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가리온이었다. 룸바르트는 가리온을 현실이 아닌 것처럼 물끄러미 쳐다 봤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소독이라도 해주세요.”

“… 잠시 기다리시오.”

룸바르트는 두 얼굴을 등지고 돌아섰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너무 당황했나.’

몽롱하게 복도를 걸어 약들이 가득 찬 방으로 들어갔다.

각종 약초 뿌리들과 추출액들이 병마다 가지런히 들어가 있었다.

룸바르트는 소독약을 쥐고 나가려다 다시 들어와 다른 병을 집었다.

“여기 앉혀도 괜찮죠? 의자가 이것 하나뿐이라서요.”

룸바르트가 계단을 내려서기 전부터 에바는 이것저것 물었다.

‘몹시도 챙기는군.’

에바는 룸바르트 바로 곁에서 가리온을 유심히 보았다.

“괜찮겠죠?”

“지독하군.”

화살이 꽂혔던 자리는 붉고 푸르게 물러 있었다. 그런대로 응급치료는 했지만, 그 후로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다리를 썩힐 작정이었소?”

룸바르트의 말에 가시가 박혀 있었지만, 가리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바도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듯 가리온에게 열중했다.

“… 가리온. 저도 데카론에 참여하겠어요.”
룸바르트는 몸을 돌리고 병 마개를 땄다. 익숙한 타란툴라의 독이 살짝 흔들렸다.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에바. 나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오로지 나를 위해서 데카론에 참여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일이요?”

가리온과 에바가 이야기하는 사이 룸바르트는 녹색 액체를 붕대에 살짝 묻혔다.

‘이 정도면 이틀 버티다 죽어버리겠지.’

룸바르트는 붕대를 가리온의 환부에 가져다 대었다.

“으으.”

가리온을 보는 에바의 눈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조금만 참아요.”

룸바르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붕대를 돌돌 말았다.

가리온도, 에바도 독을 묻힌 붕대가 감겨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개인적인 일이란?”

가리온은 슬쩍 룸바르트의 눈치를 보는 듯 하다 말문을 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님이 하신 약속이 있소.”

“약속?”

“아버지에 관한 일이오.”

“아버지라면?”

에바가 조심스럽게 룸바르트를 살피며 되물었지만 룸바르트의 귀는 이미 가리온에게 사로잡혀버린 상태였다.

헬리시타는 점차 안정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 수많은 시체들도 거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리온을 인카르 신전으로 불러들였다. 이제 여정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가리온뿐 아니었다. 데카론을 위해 각지에서 불러들인 사람들을 적재적소로 보낼 시간이었다. 곧 데카론의 여정을 시작하는 이들을 축복하는 의식이 헬리시타에 벌어졌다.

룸바르트는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가에 대해서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없었다.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가리온의 입에서 슈마트라 초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가 살아 있어. 가리온을 다시 만나야 해.’

영웅이 될 여정에 들뜬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룸바르트는 앞을 제대로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멀리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아이언 테라클이다!’

룸바르트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이언 테라클! 아이언 테라클!”

빽빽한 관중들 사이로 룸바르트는 겨우 아이언 테라클의 옷깃을 잡았다. “뭐야?”

아이언 테라클은 눈을 부라리며 룸바르트를 위아래로 훑었다. 금방 기억해낼 수 있었다.

“겐조 가의 아들이로군.”

룸바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데카론에 지원하겠습니다.”

아이언 테라클은 룸바르트를 이상하다는 듯 물끄러미 보았다.

그럴만했다. 가리온 초이의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가 살인한 사람은 겐조 가의 사람, 룸바르트의 사촌 다이몽 루세였다. 그뿐 아니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룸바르트 겐조의 아버지 티몬 겐조에게도 검을 휘둘렀다.

때문에 아이언 테라클은 가리온 초이의 밑으로 들어가려는 룸바르트를 의아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탁 드립니다.”

아이언 테라클은 룸바르트의 정중한 인사가 당황스러웠다. 룸바르트는 예의 바른 것과는 거리가 먼 청년이었다. 아이언 테라클은 곰곰이 생각하다 룸바르트에게 말했다.

“알겠네.”

“신임 청기사단장이 속한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하지만.”

“다시 한 번 부탁 드리겠습니다. 아이언 테라클님이라면 분명히 절 도와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난 그런 힘 없네.”

“당신은 인카르의 조디악이십니다.”

“자네의 의도를 모르겠군.”

“도와주십시오.”

아이언 테라클은 룸바르트를 다시 훑었다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안되네.”

아이언 테라클은 룸바르트에게 엄하게 다그쳤다.

룸바르트는 고개는 끄덕였지만 말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따라오게.”

온통 들뜬 루앙 광장을 헤치며 룸바르트는 가리온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비나엘르 파라이의 말은 가리온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데카론의 의의와 앞으로 실현시킬 미래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는 중이었다.

“여러분은 트리에스테 대륙의 미래입니다!”
“우와아아!”

사람들은 비나엘르 파라이가 무슨 말을 하던지 환호했다.

헬리시타의 루앙 광장에 가득한 축제 분위기는 이미 모두를 영웅으로 만든 상태였다.

그러나 가리온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며칠 보지 못한 사이에 더욱 야위어졌구나.”

행사가 시작되기 전,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리온을 따로 불렀다.

정말로 가리온의 얼굴은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니, 얼굴빛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버티고 있는 가리온의 정신력이 오히려 대단한 것이었다. 가리온은 자신의 몸 상태도 모르는 체 너무 무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화살 맞은 곳은 치료를 했구나.”

비나엘르 파라이는 힐끗 가리온의 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에바 덕분입니다…. 어머니의 재도 구해주었습니다.”

가리온은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어쨌든 다행이구나.”

비나엘르 파라이는 잘라 말했다.

“이제 조금 뒤면, 데카론의 영웅들이 헬리시타를 떠나 인카르의 이름을 널리 알릴 것이다.”

가리온은 잠자코 비나엘르 파라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앞으로 수많은 이계의 무리들을 죽고 죽여야 해.”

비나엘르 파라이의 말들은 모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너는 네 아버지도 찾아야 한다.”

가리온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난 너를 로아로 보내겠다. 듀스 마블이 백기사단을 찾아갔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로아성의 집정관 델카도르가 백기사단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도움을 받아라.”

가리온은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

“가리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옆에는 에바가 있었다.

"어제 치료한 곳은 괜찮아요?”

가리온이 에바를 향해 웃는 순간, 비나엘르 파라이가 준비한 연설의 마지막 문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데카론을 통해 트리에스테 대륙의 모든 인간들에게 약속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트리에스테 대륙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