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io - 의식
5장
Jaden Boys

민병대

“우와! 엄청 크다!”

“거인이다!”

자덴성의 아이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껌벅거릴 시간도 없이 바기족의 발에 사내아이 하나가 밟히더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허억!”

“도망가자!”

아이들이 우르르 골목으로 돌아나갔다.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자빠진 아이들은 바기족의 창에 걷어차이거나 그냥 밟혀버렸다.

“으아악!”

상대를 제압하는 덩치의 바기족 전사는 아이가 밟혔다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잿빛 눈동자를 희번덕 돌리며 주위를 여기저기 쏘아보았다. 크릉거리는 사나운 소리와 함께 역겨운 황색 냄새가 불거져 나왔다.

황색 벽돌 뒤에 숨어 있던 쿠리오는 입을 쩍 벌린 채로 고개를 돌렸다.

“놈들에게 제대로 당하고 있어.”

“이제 어쩌지?”

쿠리오는 벽 밖을 한 번 더 힐끔 보고는 말했다.

“우선 아이들과 여자를 대피시키세.”

“어디로?”

“저기!”

쿠리오는 손가락으로 금을 캐던 갱 하나를 가리켰다.

“저곳이면, 바기족들도 모를 거야. 어서! 서둘러!”

“알았어!”

몇몇이 아이들과 여자를 대피시키기 위해 떠나자 남은 사람들은 눈을 움찔거리며 쿠리오를 지켜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어느 새 민병대의 지휘를 쿠리오가 하고 있었다. 쿠리오는 그 얼굴 하나하나를 둘러보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서둘렀다. 싸워서 이겨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저들과 싸우러 갑시다.”

“엥? 그렇지만 저 덩치들에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구.”

“당연하지.”

“그건. 그렇지.”

이구동성으로 초조한 듯, 몸을 떨었다.

“그냥 위로 올라가서 화살만 쏘면 안 되겠나?”

“여기 몰아넣고 위에서 쏘면 다 죽을 거 아냐!”

“그러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 화살이 모조리 튕겨 나가는 거 보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세지타족이 아닌 이상, 저 덩치의 가죽을 화살로 뚫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차라리 다같이 달려들던지.”

정육점 주인이 고기 썰던 칼을 집어 들었다.

“한데 모여 있으면. 그냥 순식간에 깔려 버릴 것 같은데?”

대장간 주인이었다. 쿠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무언가 멀리서 공격할 방법이…….”

쿠리오의 눈꼬리에 갱이 들어왔다.
‘그래! 자덴은 광산 도시야. 광산 안에서라면 자기들이 훨씬 유리하다!’

쿠리오는 눈으로 갱을 재어 보며 소리쳤다.

“그래! 저거야!”

“응?”

“저기로 유인합시다!”

“저기? 어디? 갱?”

“갱? 갱이라구?”

“갱에는 사람들을 보냈잖나.”

“아니. 그 쪽 말고 저 반대편으로 유인합시다.”

“그래서? 갱으로 유인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저 바기족들을 가두고, 가두고. 그래! 입구를 무너뜨리는 겁니다. 갱이 무너지면 바기족들은 거기에 갇혀버리겠죠.”

“뭐?”

다들 놀랐다. 갱은 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자덴 성의 사람들은 광산 안에 있는 황금을 캐내어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갱은 우리 돈줄인데. 여기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소?”

“그래도 먼저 살고 봐야지 않겠습니까? 저들한테 우리가 그냥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갱은 어떻게 무너뜨릴 텐가?”

대장간 주인이 물었다. 모두 대장간 주인을 바라보았다. 두려워했지만 막는 사람은 없었다. 바기족에게 치여서 죽는 것 보다는 우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소망이었다.

“갱은……”

쿠리오는 고개를 들어 자덴 성을 바라보았다.

“인카르 교단의 파견관에게 부탁해 봅시다.”

뒷골목과 성이 연결된 막다른 골목길의 문은 잠겨 있었다. 쿠리오가 황급히 문을 흔들고 두들기자 보조 문이 열리며 안에 사람이 나왔다. 겁에 질려 사색이 된 그는 인카르에서 파견된 수도자였다.

“어서 이 문 여시오!”

“어서요!”

하지만 수도자는 고약한 냄새를 스멀스멀 풍기며 다가서는 우람한 덩치의 바기족을 보자 얼굴이 파래져서는 쪽문을 닫아 버리고 문을 철저히 잠갔다. 쿠리오는 문을 쾅쾅 두들기며 소리쳤다.

“빨리 문 안 열어요! 다 죽게 생겼단 말입니다!”

“어서 이 문 열어!”

“제길!”

“비켜봐!”

대장간 주인이 문 옆에 뉘여 있던 삽을 들어 문을 찍었다. 쩍쩍 균열을 일으키는 소리와 함께 나무로 된 문에 구멍이 뻥 뚫렸다.

“바기족도 이런 식으로 하더군.”

"으아아!"

구멍 안에서 수도자의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됐어!”

“저기다!”

“세지타족이다!”
“세지타족이 저기 있다!”

쿠리오와 일행의 옷이 세지타족의 것이었다.

“젠장!”

쿠리오는 경비병 몇을 붙잡고 대장간 주인에게 말했다.

“파견관과 함께 두 번째 갱으로 가서 기다리십시오. 저희가 바기족을 끌고 다니다 그리로 가겠습니다.”

“뭐?”

“세지타족을 잡아 죽이자!”

“서둘러 와야 합니다!”

쿠리오와 친구들은 일단 골목을 다시 나왔다. 그 동안 대장간 주인은 서둘러 문을 따고 들어가 숨었다. 사제는 책장 옆에 붙어 덜덜 떨고 있었다.

“후우. 내가 인카르 교단을 믿는 건 아니지만, 일단 살고 봐야겠으니…. 이봐. 파견관. 어서 일어나 가지.”

대장간 주인은 파견관의 팔을 붙잡아 나섰다.

캄비라 바투가 독려할 필요도 없이, 바기족 전사들은 알아서 우르르 자덴 골목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제 자덴 성은 바기족님들의 것이다!”

“유후! 좋았어!”

전사들은 쿵쿵쿵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캄비라 바투는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전사들이 지나간 곳에 남은 흔적은 모두 노약자들뿐이었다. 이들이 미처 피하지 못해 이렇게 된 것이라 쳐도, 세지타족으로 보이는 인간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지금의 모습이 세지타족의 기습을 위한 위장술일 수도 있었지만 캄비라 바투는 우선은 흥분한 바기족 전사들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세지타족이다!”

누군가의 외침으로 캄비라 바투는 얼른 방향을 틀었다. 바기족 전사들도 마찬가지로 캄비라 바투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뭐야? 저건?”

우람한 덩치의 바기족 앞에, 너 댓의 허름하고 작은 세지타족이 옹기종기 뛰어 다니고 있었다.

“으응? 저거 세지타족이야? 뭐야. 너무 작잖아?”

“하하.”

“푸하하하하.”

바기족 전사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냐? 저것들은?”

“뭐, 이거 전쟁이라고 할 수도 없겠구먼.”

“세지타족이 뭐 이래.”

“너무 싱거운데. 이거.”

“어이! 꼬마들! 도망치지 말고 거기 서라구! 애들은 특별히 살살 봐 준단다!”

“푸하하.”

쿠리오와 일행은 분했지만 계속 뛰었다. 저들을 힘으로 당해 낼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우둔한 바기족들이라 덫으로 유인하는지도 모르고 계속 따라와 주는 것은 다행이었다.

헉. 헉.”

“좋아. 다 온 것 같은데?”

굽이 진 언덕을 돌아 온 쿠리오의 일당은 가슴을 심하게 들썩거렸다. 몸집이 큰 바기족의 걸음이 너무나 커서 보통 때보다 몇 배는 빠르게 뛰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 도망간 거냐?”

“기껏 온 게 여기라니. 쯧쯧. 불쌍하구나.”

캄비라 바투는 광산 안을 천천히 살피며 말했다

“너희는 세지타족이 아니지?”

쿠리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지타족은 어디 있느냐?”

“우, 웃기지 마라! 내가 바로 세지타족이다!”

쿠리오가 나섰다.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바기족 전사들은 잠시 멈칫하는 것 같더니, 곧 다시 폭소했다.

“우하하. 우하하하.”

“큭. 크크. 이 애송이. 그렇게 떨어서는 쥐새끼 한 마리도 못 죽여!”

“뭐, 뭐야?”

불같이 화가 난 쿠리오는 활을 쏘려고 들었다. 세지타족의 무서운 활솜씨를 잘 알고 있는 바기족은 폭소를 바로 멈추고 쿠리오를 주시했다.

‘화, 활을 쏘아야 하는데!’

쿠리오는 활을 쏘고 싶었지만 활 사위를 당기고 있는 것조차 너무나 힘에 겨웠다. 얼굴이 달아오르며 땀이 솟으려 했다.

‘아, 안돼!’

바기족 전사들은 쿠리오의 작은 흔들림까지도 미세하게 반응하며 주시했다.

캄비라 바투도 저 애송이가 정말로 세지타족인지 확인하기 위해 유심히 살펴보았다. 손을 극도로 떨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애송이는 세지타족이 아님이 확실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표정은 점점 웃는 낯으로 변해갔다.

“뭐지?”

캄비라 바투의 초점은 점점 쿠리오의 눈동자에 가까워졌다.

“시선이……. 활을 보고 있지 않아!”

캄비라 바투는 쿠리오를 따라 자연스럽게 시선을 위로, 위로 올렸다.

“자덴은 우리들의 땅이다!”

애송이의 외침과 함께 캄비라 바투의 눈에 화려하게 빛나며 날아오는 불덩이가 입구를 가리는 것이 보였다.

“이런! 모두 흩어져! 어서 흩어져!”

바기족 전사들은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진다!”

“갱이 내려앉을 거야! 흩어져서 피해!”

캄비라 바투는 계속해서 외쳤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바기족 전사들은 하늘을 보느라, 불덩이를 피하느라, 서로 거대한 덩치를 피하느라 정신없이 우왕좌왕했다.

“작전이 들어맞고 있는데!”

쿠리오는 친구들에게 외쳤다.

“좋았어!”

“우린 반드시 여길 지킬 수 있을 거야!”

“될 줄 알았다니까!”

쿠리오와 친구들의 얼굴에 희망의 웃음이 피어올랐다.

“자! 우리는 어서 나가자!”

“쿠리오! 이 쪽! 이 쪽이 비었네!”
“그래! 알았어!”

쿠리오는 서둘러 기어갔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부신 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금?”

캄비라 바투는 묵직한 창을 내려 꽂고 애송이를 반기며 씰룩였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들! 전쟁이 장난인 줄 아느냐! 세지타족은 모두 어디로 도망갔는지 어서 말해라!”

쿠리오는 벌벌 떨며 밖에 있는 사람들이 무사하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틱-.

자덴성의 초장이가 불을 켰다. 작은 불이었지만, 워낙 갱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크게 위험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침략으로 인해 대피하는 일이라 어른들은 엄숙한 분위기였다. 밖에서 더 뛰어 놀고 싶었던 철없던 아이들은 어두운 갱에 들어오자 무서운 듯 움츠렸고, 몇몇은 울기도 했다. “쉿. 조용히 해. 그렇게 자꾸 울면 바기족이 쫓아온단 말이다.”

아이는 엄마의 말에 겁을 먹었는지, 울음을 그치고 계속 딸꾹거렸다.

“이 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초장이는 갈림길에 이르자 왼쪽을 가리켰다.

“전에 이리로 가면 헬리시타까지 갈 수도 있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전에는 화기애애하기 그지없던 갱이 무거운 침묵만이 돌자, 어쩐지 불안해진 사람들은 머뭇거렸다.

“너무 많이 들어가는 거 아닌가요?”

“헬리시타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요?”

초장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릴 도와 줄 사람이라도 구해 볼까 하구요.”
다들, 바기족 전사들과 자신들의 민병대가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큰 전력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초장이의 말에 토를 달수가 없었다. 세지타족이 사라져 버린 지금, 자덴성에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도움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울먹이는 아이들을 끌고 갱의 더 깊은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