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io - 의식
Apocrypha Tale

클로비스의 노래

파르카 신전을 떠나 방랑하던 클로비스는 드디어 풍요로운 땅 네오스까지 도착했다. 네오스는 기대했던 대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었다. 특히 낙엽이 생기기 시작하는 초가을이었기에 좋은 쌀과 과일을 사려는 상인들로 북적대었다.

하루 종일 사람들로 가득한 네오스는 웃음이 끊이질 않는 곳이었다. 낮이면, 곳곳에서 흥정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목청을 높여갔고, 밤이면 맛 좋은 과실주를 파는 가게들이 노란 불빛과 악사들을 불러다 놓고 밤거리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클로비스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클로비스는 악사들의 연주에 자신이 지은 가사를 붙여,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가사는 고귀한 시처럼 어려운 말이 잔뜩 들어가 있거나, 간질거리는 사랑 노래처럼 멋스럽지는 않았지만, 클로비스의 목소리가 너무도 맑게 울렸기 때문에, 젊은 클로비스의 조각 같은 콧날과 진홍빛 입술 때문에, 여행자에게서 뿜어 나오는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와 굳세 보이는 풍채 때문에, 네오스의 여인들이 우르르 구경하러 나왔다.

덕분에 단단히 한몫을 챙기게 된 장사치들은 클로비스를 환영하며, 술을 대접하고, 묵을 곳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여인네들을 빼앗긴 장정들은 가사가 유치하다, 말도 안 되는 엉터리다, 사기꾼이다 하며 클로비스를 골렸다. 그래도, 아름다운 클로비스의 목소리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클로비스는 행복했다. 태양이 강렬한 이 곳에서, 풍요로운 사람들과 노래를 부르는 날들이 너무도 즐거웠다. 게다가 네오스의 사람들도 클로비스를 따뜻이 받아 들여 주었다. 클로비스는 마을의 미인들을 잔뜩 모아다가, 미로의 숲에서 술래잡기를 하거나, 잔뜩 싸온 음식을 펼쳐 놓고 늘어지게 놀았다.

“클로비스! 클로비스!”

“노래해줘요!”

그 맛과 영양이 듬뿍 들어있는 음식들을 클로비스는 노래 하나로 뚝딱 해치울 수 있었다.

“그래! 노래를 불러 드리죠.”

“우와!”

여인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사랑 노래를 불러 주세요!”

“네! 아름다운 사랑 노래를 불러 주세요!”

“좋아요. 좋아. 불러 드리지요.”

클로비스는 벌떡 일어나 멋지게 자세를 잡았다. 아름드리 나무를 그럴 싸하게 기댄 클로비스의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트리에스테 대륙이 있기도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운명적인 사랑

칼과 엘

트리에스테 대륙이 휘몰아치던 그 날

하늘이 결정지은 비극적 사랑

칼과 엘

트리에스테에서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

칼과 엘

하지만 언제나 사랑은 고귀한 것

엘은 남아 칼을 기다리네

엘은 남아 칼을 기다리네

그것이 다크 홀 그것이 다크 홀

파르카 신전에 숨겨져 있는 다크 홀

두 번째 힘을 감추어두고 기다린다네

엘이 기다린다네

…….
“사랑 타령은 좀 더 안전한 곳에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클로비스는 노래를 멈추었다.

“어머나!”

“아이. 어쩌나.”

“죄송해요. 디에네 비노쉬님.”

클로비스와 함께 유희를 즐기던 여인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자유롭게만 보이던 모습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클로비스는 우뚝 선 채였다. 아니, 클로비스는 눈 앞의 여인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여인은 반들거리는 가죽으로 용맹함을 뽐내고 있었지만, 클로비스의 눈에는 검고 촉촉한 살결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에 불과했다.

클로비스는 유쾌하게 인사를 건넸다.

“트리에스테를 방황하는 음유시인, 클로비스라 합니다.”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조아리는 다른 여인들을 향해 나긋이 말했다.

“어서 마을로 돌아가세요. 이 곳은 위험합니다.”

말을 마친 디에네 비노쉬는 주위를 휘 둘러본 후, 숲 속 더 깊이 정찰하기 위해 움직였다. 클로비스는 디에네 비노쉬의 등에다 외쳤다.

“아름다운 아가씨! 다음에 또 만나기를!”

디에네 비노쉬는 움찔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나! 클로비스님!”

“어쩌자고, 디에네 비노쉬님께 그런 말씀을!”

간드러지게 앙탈부리는 여인들의 눈빛 사이로 클로비스는 디에네 비노쉬의 모습을 쫓았다.

디에네 비노쉬는 혼자서 천천히 미로의 숲을 돌았다.

주로 정찰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혼자 쉬러 나오는 것도 꽤 여유로운 일이었다. 세지타족만으로 폐쇄된 네오스 성 안에서의 생활은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신선한 녹음을 이렇게 혼자 즐기는 것이 디에네 비노쉬에게는 작은 기쁨이었다.

푸른 이끼가 산들거리는 차가운 시냇물에 디에네 비노쉬가 살며시 발을 담갔을 때,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오셨군요.”

디에네 비노쉬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소풍을 오신 건가요? 아니면 저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디에네 비노쉬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물에서 발을 꺼내 툭툭 털고 일어나 매끈한 발등이 드러나는 가죽신을 신었다.

“누군가가, 소풍은 좀 더 안전한 곳에서 하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요.”

“저는 소풍 온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역시 날 만나기 위해서?”

디에네 비노쉬는 돌아서 휘익 둘러보았다. 지난 번에 그와 함께 깔깔거렸던 여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안도의 숨이 차 올랐다.

“돌아가야겠군요.”

디에네 비노쉬는 활을 집어 들었다. 클로비스가 앞을 가로 막고 섰다.

“제 눈을 한 번만 봐주시겠습니까?”

클로비스는 정중히 부탁했다.

“그럴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디에네 비노쉬는 도도하게 눈을 내리 깔았다. 긴 속눈썹이 눈 아래를 덮는 그 모습이 클로비스에게는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

클로비스는 디에네 비노쉬의 귓가로 다가갔다

“카론의 눈빛을 마주치게 되면 온 몸이 말라버린다지만.”

디에네 비노쉬는 클로비스의 숨소리에 움찔했다. 간지럽고 따스한 기운이 빠르게 온 몸으로 번져 나갔다.
“제 눈과 당신의 눈이 마주쳐도 당신은 틀림없이 말라버릴 겁니다.”

디에네 비노쉬는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이 무슨 마법이라도 하나 보죠?”

무의식적으로 눈이 클로비스에게 향했다. 디에네 비노쉬는 황급히 눈을 다시 돌리려 했지만 클로비스는 그 눈을 놓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공기가 어색해진 것 같았고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디에네 비노쉬는 분한 마음이 들어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리려 했다. 클로비스가 놓치지 않고 어깨를 꾸욱 잡았다.

“이대로 있어요.”

디에네 비노쉬의 눈에 클로비스의 얼굴 윤곽이 꼼꼼하게 잡혀 들어왔다. 그는 보드라워 보이는 짙은 갈색 눈썹과 각이 진 눈, 흠 없이 뻗은 두툼한 콧날과 갈색 수염이 여물어지는 턱 선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요. 잘했어요.”

클로비스는 디에네 비노쉬를 놓아주었다. 디에네 비노쉬는 그래도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말없이 클로비스가 잡았던 어깨를 주물렀다.

“이제. 내가 숲 입구까지 바래다 주리다.”

클로비스는 디에네 비노쉬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안고 걸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디에네 비노쉬는 다정한 그 손길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숲을 그대로 걸어 나왔다. 멀리 네오스가 보일 무렵 디에네 비노쉬는 웃음이 나왔다.

“훗, 누군가가 날 데려다 주는 건 처음이에요.”

“그래요?”

“당신은 매일 이렇게 날 데려다 줘도 좋겠어요.”

“좋은 생각이군요.”

클로비스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게 다예요? 놀랍지 않아요? 당신은 방랑자고, 나는 세지타예요. 게다가 우리는 많이 만난 것도 아니고, 서로 잘 알지도 못해요.”

“별로.”

클로비스가 디에네 비노쉬를 깊게 바라보았다.

“사랑에 빠질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디에네 비노쉬는 뭐라고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선물로, 내가 제일 잘 하는 노래를 해주죠.”

이제는 네오스의 대부분 사람들도 알고 있을 그 노래를 클로비스가 디에네 비노쉬에게 속삭였다.

트리에스테 대륙이 있기도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운명적인 사랑

칼과 엘

트리에스테 대륙이 휘몰아치던 그 날

하늘이 결정지은 비극적 사랑

칼과 엘

트리에스테에서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

칼과 엘

하지만 언제나 사랑은 고귀한 것

엘은 남아 칼을 기다리네

엘은 남아 칼을 기다리네

그것이 다크 홀 그것이 다크 홀

파르카 신전에 숨겨져 있는 다크 홀

두 번째 힘을 감추어두고 기다린다네

엘이 기다린다네

…….
“엘이 기다린다네…….”

디에네 비노쉬는 가만히 후렴구를 따라 불렀다.

“당신도 알고 있군?

“요즘 최고로 유행하는 노래니까요.”

“나는 당신을 기다렸소.”

클로비스의 말에 디에네 비노쉬는 눈을 맞추며 다시 한번 후렴구를 나직하게 속삭였다.

“엘이 기다린다네. 엘이 기다린다네…...”

클로비스와 디에네 비노쉬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얼마 후, 클로비스는 네오스를 떠났다.

그리고 디에네 비노쉬는 빨간 곱슬머리와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