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orak - 이교도의 유물
6장
Creation

노라크 교도의 유물

누트 샤인은 아까부터 동굴 벽에 가만히 기대어 서서 뿌리에 매달려 있는 가리온과 시에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어두운 벽에 기대어 있는 누트 샤인이 보이지 않았지만, 반대로 누트 샤인은 밝은 곳에 있는 두 젊은이가 잘 보였다.

뿌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두 사람의 상태로 미루어보아, 누트 샤인을 따라올 수는 없을 것 같았고 누트 샤인은 곧 일어날 일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가리온과 시에나가 궁지에 몰렸을 때 자리를 피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고서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잠시 후 노라크 교도들이 세운 또 다른 방이 나올 것이었다. 누트 샤인은 그 때만 노린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가리온과 시에나는 용암이 처리해줄 것이다. 누트 샤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책에 적혔던 내용을 떠올렸다.

'신과 가까운 자가 폭군의 나무 아래 잠들어 있는 용사의 무덤에 들 때, 시간의 파괴가 재현될 것이니……. 실타래처럼 엉킨 침입자는 대지의 생성물에 무릎을 꿇을 것이며 침입자로 하여금 만들어진 생성의 공간은 그대가 원하는 것을 인도하리라.'

지금 상황과 결부시켜 본다면, "생성의 공간"이 어서 나타나야 했다. 뿌리가 용암을 피해 움직이고 있는 지금이 바로 이교도들의 비밀 공간이 드러나야 할 시점이었다.

“왜 이렇게 더디지…….”

누트 샤인은 느긋함을 가장했지만, 사실 두렵기도 했다. 조금 전 시에나가 용암 속으로 떨어질 뻔하는 순간 누트 샤인도 놀란 것이다.

그는 자칫 자신도 그녀 같은 위기를 겪을까 불안한 마음에 몸을 떨었다. 저 아래 들끓는 뜨거운 용암 속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몸뚱이를 상상하면 두려움에 머리칼이 갈갈이 곤두섰다.

'아직 평생소원을 이룬 것도 아닌데.'

게다가 가리온이 슈마트라 초이의 아들이라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누트 샤인은 자신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날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호화롭고 풍요롭게만 보이던 그의 삶을 한꺼번에 무너뜨린 단 한 사람!

“슈마트라 초이는 그의 후손이야……. 저 기사 놈이 슈마트라 초이의 자식이라니……. 크크……. 그의 핏줄은 기생충처럼 계속 나타나는군. 나는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말이야……. 죽여 버리겠어……. 기필코!”

이빨 사이로 짓뭉개듯 내뱉는 말투에는 서리서리 원한이 묻혀 있었다. 누트 샤인이 살기 띤 눈빛으로 가리온을 바라보는 사이, 드디어 그가 서 있던 곳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황토색의 누더기 망토로 온 몸을 단단히 감싼 누트 샤인이 서 있던 나무뿌리는 다른 것들처럼 흙빛이 아니었다. 이상한 표식이 잔뜩 새겨져 있는 뿌리는 용암의 빛을 받자 신비한 푸른색을 내뿜으며 영롱하게 빛났다.

“역시 여기가 맞았어. 크크크…….”

줄기에 파인 작은 홈을 밟고 웅크리고 있던 그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빛에 드러난 누트 샤인을 표적으로 가리온은 뿌리를 타고 위로 위로 계속 올라갔다. 누트 샤인의 말에 흥분한 가리온의 동작은 무척이나 거칠어져, 시에나는 가리온을 꼭 잡지 않으면 자칫 밑으로 떨어질 지경이었다.

"어이쿠, 어이쿠. 조심해야지. 그러다 젊은 아가씨 떨어진다구. 그럼 네 놈이 여태까지 기껏 애쓴 것도 소용없어지잖아? 크크크……. 뭐, 그렇게 되면야 나는 수고를 덜겠지만……. 크크크……."

누트 샤인은 눈알을 부라리며 가리온과 시에나를 조롱했다.

"이 괴물보다도 못한 바기족 놈아! 기다려라!"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쯧쯧. 늙은이를 공경할 줄 알아야지! 그렇게 예의를 모르니까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죽는 거다!"

누트 샤인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굵고 파란 뿌리가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상한 표식이 새겨진 부분이었다. 그러자 그 사이로 눈부시게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뿌리가 눈을 뜨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아! 이곳이 유물의 방인가! 폭군의 나무 뿌리 안에 노라크들이 푸른 광석으로 지은 견고한 이교도의 나룻배! 드디어! 이렇게 내 앞에! 이 생성의 공간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줄 것이다!'

누트 샤인은 감격에 차 하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곳으로 기세 등등하게 걸어 들어갔다.

"이 놈!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오너라!"

가리온은 누트 샤인의 모습이 사라지려 하자 더욱 피를 토하며 외쳐댔다. 그러나 동굴 벽에 부딪히는 가리온의 목소리만 헛되게 울려 퍼질 뿐, 누트 샤인의 대답은 없었다.

누트 샤인이 사라지자 동굴의 흔들림은 다시 시작됐다. 뿌리의 눈은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서둘러야겠어요!'

어느 새 눈을 뜬 시에나가 용암이 흐르는 것을 쳐다보며 가리온의 어깨를 탁탁 쳤다. 넓은 노라크 동굴에 밀려드는 용암은 이제 이끼를 덮었고, 광석까지 차오르려고 했다.

그런데 동굴 구석구석에 자라난 광석 무더기에 용암이 닿자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불같이 뜨거울 용암이 푸른 광석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굳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광석이 가지고 있던 신성한 힘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신성한 힘에 의해 용암은 굳고 또 굳었다.

그것은 마치 불의 사슬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용암 동굴의 원리 같은 것이었다. 용암이 광석에 닿는 순간 딱딱해진 표면과는 반대로 아직 뜨겁고 말랑말랑한 내부의 용암이 다시 튀어나와 푸른 광석에 닿게 되면 또 다시 굳어버리고 거기서 또 미처 굳지 않은 부분이 튀어나와 굳는 과정이 되풀이되는 식이었다.

그러나 자연의 놀라움을 감탄하며 그 순환을 경이롭게 바라 볼 상황이 아니었다. 용암이 언제까지 어느 정도로 분출될지 전혀 알 수 없는데다가 누트 샤인이 들어간 곳은 점점 닫히고 있었다.

다급해진 가리온은 누트 샤인이 기대어 있던 푸른 뿌리로 옮겨 타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저 뿌리로 옮겨 타는 것이 좋겠습니다! 괜찮겠어요?"

시에나는 멀리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나는 뿌리를 바라보았다.

‘저기까지 가는 건 무리가 아닐까…….’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 이 분을 믿어보자…….’

시에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 봅시다!"

가리온은 매달려있던 뿌리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뿌리는 그네처럼 위 아래로 움직이면서 점점 높이 올라갔다. 흔들거리는 뿌리 그네의 반동이 동굴에 꽉 차 있던 뜨거운 열기를 갈랐다. 시에나가 두 눈을 꼭 감자, 가리온은 기합과 함께 휘익 몸을 날렸다. 뜨거운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때렸다.

“헛!”

두 사람이 잡고 있던 뿌리는 파란 뿌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가리온이 반동으로 힘을 더 주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용암의 날름거리는 불길 속으로 그대로 빠져버릴 뻔 했다.

그렇지만 푸른 뿌리에 매달리는 순간, 가리온의 발목이 갈라지는 듯, 갑작스러운 고통이 치고 올라왔다. 가리온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목 쪽 갑옷이 타 들어가면서 그 자리에 이상한 것이 달라붙어 있었다. 용암 한 가운데서 길쭉한 것이 튀어나와 뿌리 끝에 간신히 매달린 가리온의 발목을 휘어잡은 것이다.

"으아악!"

'저것은 라쿤!'

시에나는 발이 떨어져나갈 듯한 아픔에 얼굴이 일그러진 가리온에게 라쿤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누트 샤인의 촉수에서 뻗어 나온 독기로 여전히 수월하게 말을 뱉어낼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 등을 두드리며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러나 오로지 뿌리를 놓치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손아귀에 가득 힘을 주고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가리온은 밑을 내려다볼 겨를이 없었다. 그의 목 뒤로 끈끈한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올랐다.

시에나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탁탁 막혀왔다. 그렇지 않아도 철로 된 갑옷 속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용암의 열기를 참으려면 온 몸이 말이 아닐 텐데, 저런 괴물까지 들러붙어 버리다니!

마법이라도 쓰고 싶었지만, 시에나는 포스 엘리멘터들을 불러올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법을 사용한다면 자칫 가리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시에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리온. 어쩌면 좋아요!'

몸과 마음이 자글자글 타 들어가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일었다. 시에나는 나오지 않는 말소리를 대신하여 잡은 손길에 힘을 주었다. 가슴 아픈 눈물이 샘솟듯 흘러나와 두 뺨을 적셨다.

“괜찮아요. 윽……. 올라갈 수 있어요…….”

가리온은 끊어질 듯 아픈 발에 힘을 주어 지그시 위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 길쭉한 것이 고무줄처럼 따라 올라왔다.

“늘어나는 괴물인가. 으윽.”

가리온의 고통이 더 심해져 갔다. 시에나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더 힘을 내세요! 그렇지 않으면……!'

하지만 시에나의 마음과는 정반대로 얕았던 용암 늪에서는 가리온의 발목을 잡은 것과 흡사하게 생긴 길쭉 길쭉한 라쿤들이 여기저기서 솟아나고 있었다. 크기도 천차만별인 그것들이 닿는 순간 찢어질 듯한 아픔을 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가리온은 발을 빼내기 위해 식은땀을 흘리며 있는 대로 힘을 주었다.

“잡히지 않아.”

그러자 라쿤은 가리온의 속셈을 눈치챈 것처럼 촉수 같은 돌기들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돌기들은 점점 길어지면서 발목이 잡힌 곳까지 서서히 뻗어 올라왔다.

'조심해요! 돌기들이 올라오고 있어요!'

시에나는 돌기들이 심상치 않은 것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돌기들이 가리온의 발에 박혀 신경을 자르고 피를 빨아먹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시에나는 다짜고짜 자신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머리띠를 집어 던졌다. 인카르의 어린 여사제들이 정신력을 모으는 도구로 쓰는 머리띠였다.

'다가오지 마! 저리가! 저리가!'

다급해진 시에나에게는 지금 자신이 던진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가,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가리온을 이렇게 밖에 도울 수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런 시에나의 심정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돌기들은 멈칫하는 것 같더니 머리띠를 살짝 피했다. 머리띠는 속절없이 용암 속으로 떨어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용암이 머리띠를 삼키자 돌기들은 느물대듯 또 다시 조여 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두 세 개의 돌기가 더 자라나 시에나가 업혀있는 곳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가리온은 발길질을 하면서 버둥거리다가 돌기가 어깨 높이까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이것부터 빨리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점 더 마비되는 것 같은 자신의 발목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이잇, 더 이상은 안돼! 으아아아!"

가리온은 이를 악물고 뿌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전해오는 큰 힘에 그의 발을 감고 있던 라쿤도 발목을 놓쳐 버렸다. 흠칫한 돌기들이 뿌리를 감고 끌어당기려고 했지만, 용암이 광석에 닿아 굳어진 것처럼 돌기도 푸른 뿌리에 닿자 신기하게도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돌기가 돌처럼 굳어버리자, 끝에 달려 있던 시뻘건 것이 늘어나며 양 쪽으로 좌악 갈라졌다. 갈라진 곳의 중심은 무언가가 투명하면서도 도톨도톨하게 돋아 있었다. 라쿤이 입을 벌려 촉수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 도톨도톨한 것은 점점 더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가리온을 향해 좍좍 뻗어갔다.

'촉수가!'

시에나의 수정구슬처럼 커다란 눈이 놀라움에 더욱 휘둥그래졌다. 그 와중에도 가리온은 계속해서 뿌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는 지금 밑을 내려다보고 놀랄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가리온은 마지막 힘을 다해서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의 눈에 이제 희미해져 가는 뿌리의 눈이 살며시 들어왔다. 누트 샤인이 사라진 장소였다. 가리온과 시에나가 생전 처음 보는 이계의 표식이 빛이 사라지고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표식이 무엇인지는 두 사람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누트 샤인은 분명 이리로 몸을 숨겼고, 아래로부터는 위험천만한 빨판들이 계속 뻗어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가리온의 머리 속을 스쳐갔다.

“저 뿌리가 닫히기 전에 빨리 가야 해!”

희미한 푸른 빛에 가리온의 손이 닿으려던 순간,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마치 처음 입구를 지나 통로로 들어오던 순간 같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을 둘러 싼 거대한 뿌리들이 계속 한데로 모이며 빠른 속도로 통로를 꾸역꾸역 메웠다. 덕분에 용암에서 솟아난 괴물 라쿤은 더 이상 가리온과 시에나를 쫓아올 수 없게 되었지만, 가리온과 시에나는 뿌리 속에 갇혀 버렸다.

불안한 고요 속에서 막막한 어둠이 동굴 안을 무겁게 채웠다. 가리온과 시에나의 숨소리만이 불규칙적으로 울릴 뿐이었다. 다음엔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뒤섞인 숨소리였다.

문득 시에나는 가리온에게 업힌 자신의 발끝이 디뎌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사…… 살아난 거야?’

흥분과 놀라움에 여전히 열에 뜬 몸을 추스르며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후, 그나마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여린 숨소리로 마법을 걸었다.

'라이트!'

순식간에 가리온과 시에나가 있는 곳이 다시 밝아졌다. 시에나의 팔찌가 재차 따스한 노란 빛을 뿜어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1,2 평정도 밖에 되지 않는 곳으로 사방이 배배 꼬여진 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뿌리는 점점 더 꼬여 들고 있었다. 공간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에나는 평평한 곳에 발이 닿는 것 같자 그제서야 가리온의 어깨를 잡고 일어섰다. 시에나의 가녀린 체구조차도 움직이기 힘든 좁은 곳이었다.

시에나는 일어서서 계속 헐떡거리며 심호흡을 하고 있는 가리온에게 빛을 비추었다.

'괜찮아요?'

그만 동그란 눈망울보다 더 큰 눈물방울을 떨구기 시작했다.

'세상에!'

"헉헉……. 움직일 수가……. 없군요……. 점점 더……. 조여 오는 것……. 같아요……."

가리온의 팔과 하반신은 거대한 나무뿌리에 묻혀 있었다. 가리온이 힘을 주려고 하자 갑옷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 가만! 가만히요!

가리온의 갑옷이 오히려 상처를 줄까 걱정된 시에나는 그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을 내저으며 속으로는 가리온을 구할 방법을 궁리하였다. ‘마법을 써 볼까, 아니야 너무 좁아……. 마법을 쓰는 것도 좋지 않아. 라이트처럼 가벼운 마법은 몰라도, 그 이상의 마법을 쓰면 촉수의 독이 퍼져서 내가 감당 못해 쓰러지고 말거야…….’

그 때, 가리온의 허리춤에 삐죽이 나와 있는 크루어가 보였다.

'이걸로!'
시에나는 가리온에게 주춤주춤 다가가 크루어를 꺼내려 했다. 기사가 아닌 연약한 여자 마법사의 팔로 크루어의 무게를 다루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뿌리에 조여져 있는 검을 빼낸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시에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가까스로 힘겹게 크루어를 끄집어냈다. 크루어가 뿌리 틈에서 휘익 빠져나오면서, 시에나가 벌렁 뒤로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서 끙끙거리며 검 집에서 검을 빼내는 순간, 크루어의 은빛이 도도하게 빛났다. 시에나의 하얀 목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제가……. 제가 이 뿌리를 잘라낼 테니 빨리 빠져 나오세요!'

시에나는 온 마음을 눈에 실어 눈빛으로 가리온에게 말한 후, 그의 팔을 얽어 매고 있는 뿌리 앞에 섰다.

시에나의 힘만으로는 여전히 검을 지탱하기 힘겨웠지만, 크루어를 질질 끌어다 내리쳤다. 자칫 검이 빗나갈까 두려워한 시에나는 온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치고 또 내리쳤다. 너무나도 서투르고 아슬아슬한 움직임이었지만, 크루어의 날카로운 날 덕분에 거대한 뿌리에는 조금씩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시에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맑은 피부 밑의 실핏줄마저 아른거렸다. 비 오듯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뿌리 하나를 잘라내자, 가까스로 가리온의 팔이 자유롭게 움직여졌다.

"이리 주시오."

애쓰는 시에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가리온은 크루어를 받아 쥐고 신중하게 검을 갈랐다. 좁은 공간이라 잘못하면 그녀가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시에나는 옆으로 비켜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멈추자, 시에나는 고개를 들고 가리온을 보았다. 웬일인가! 가리온은 여전히 몸이 파묻힌 상태였다. 가리온이 검을 휘두른 곳은 자신의 하반신이 잠겨버린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리온과 시에나가 난생 처음 보는 문양의 표식이 있던 곳, 누트 샤인이 사라진 지점이 검의 은빛 날로 난도질되어 후두두 갈라져 있었다.

'아!'

푸른 뿌리가 갈라지며 드러난 곳에서 하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어서 저리로 들어가요!"

'네? 하……. 하지만!'

시에나의 얼굴에 망설임과 두려움이 떠올랐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서 치료부터 해요. 언제 다시 뿌리가 가릴지 몰라요. 나도 곧 따라가겠소!"

가리온은 움직일 수 있는 한쪽 팔로 주저앉는 시에나를 계속 빛의 방향으로 밀어대었다. 미열과 고통으로 붉어진 그녀의 눈에서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하지만…….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