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orak - 이교도의 유물
15장
Lower Bound

이계로 가는 문

벽 앞을 기웃거리던 시에나는 조심스럽게 벽을 두드려 보았다. 울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안에 빈 공간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밀어볼까.”

시에나는 살며시 벽 가장자리를 밀었다. 그러자 두꺼운 벽이 천천히 회전하여 시에나를 푸른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빛이 드러나면서 안에 있던 사람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리온!”

시에나가 벽을 밀자 마자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가리온이었다. 하지만, 가리온은 시에나 쪽은 보지 않고 맞은편만 보고 있었다.

맞은 편에는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바기족이 그렇지 않아도 작은 몸을 구부정하게 수그리고 있었는데. 망토 사이로, 여러 개의 촉수들이 솟아나와 바르르 떨고 있었다.

시에나에게 그런 것은 처음이었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허물어져버릴 것 같은 썩어가는 듯한 냄새가 진동하는 축축하고 길쭉한 것. 그리고 그 끝에 움푹 들어가 있는 작은 종기.

자신이 그런 촉수에 당했다는 것을 떠올리자 몹시 끔찍해졌다.

“크크크. 이런. 이런. 이건 또 누구야? 맹랑한 아가씨도 아직까지 살아 있었군! 대단해. 대단해. 정말 대단해! 크크크.”

시에나의 눈 앞에서 자신에게 촉수를 박았던 바기족이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당, 당신은!”

“다시 보게 되다니. 정말 유감이군.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피까지 다 빨아들이는 거였는데 말이야. 그 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그냥 죽여 버리는 거였는데.“

누트 샤인은 시에나를 쳐다보며 이야기 했지만, 촉수들은 여전히 여러 방향으로 섞여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기분 나쁜 물컹한 것들이 튀어져 나올 것이었다. 가리온은 그 촉수들을 뚫어지도록 주시하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시에나는 조심조심 가리온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흠칫 놀라버렸다. 푸른 빛이 감도는 바닥에 시뻘건 피와 하얗고 물컹한 것들이 흥건히 고여져 있었다. 괴상하게 생긴 괴물들의 사체들도 널부러져 있었다.

“우욱.”

시에나는 역겨운 그 모습들에 구역질이 났다. 고개를 흔들며 주춤거리자, 그 순간 널부러져 있던 괴물 중 하나가 시에나의 발목을 잡았다.

“꺄악!”

시에나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고, 가리온은 괴물의 팔을 떼어 버리려고 뛰어들었다. 긴장이 깨지자 누트 샤인은 그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촉수를 곤두세워 가리온에게 쏜살같이 다가갔다.

가리온이 은 검으로 스켈리톤 폰의 뼈를 가르는 순간 시에나는 덮쳐오는 누트 샤인의 모습을 보고 주문을 외쳤다.

“에어 멤브레인!”

시에나가 급하게 생성한 투명한 작은 막이 촉수를 튕겨 내니, 누트 샤인은 조금 놀란 듯한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막에 할퀴어버린 자신의 피를 핥았다.

“하위 마법사는 아닌가 보군. 둘 다 제법이야.”

검의 방향을 바꾼 가리온은 누트 샤인을 노려보며 시에나에게 손을 건넸다.

“괜찮소?”

“고마워요. 가리온님…….”

가리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누트 샤인을 여전히 노려보았다. 누트 샤인은 잠시도 마음을 편안히 놓을 수 없는 상대였다.

“빨리 여기를 피하는 것이 너희들에게 좋을 것인데.”

가리온과 시에나는 누트 샤인이 말하는 것을 잠자코 들었다.
“스켈리톤 비숍이 나타났더란 말이지. 음. 뼈 맛으로 봤을 때 아직 신선하던데. 저 장신구들은 노라크 교도들의 것인가?”

누트 샤인은 땅 밑에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는 스켈리톤 비숍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저 스켈리톤 비숍은 노라크 교도들이 이계에 몸을 팔아버린 것이겠군. 그런데 그들 혼자만의 힘으로 저 지경까지는 갈 수 없을 테고……. 역시 여기 어딘가에!”

시에나는 가리온을 쳐다 보았다. 가리온이 누트 샤인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것이 나중을 위해 좋을 것이었다. 하지만 시에나는 저 눈치 빠른 바기족을 더 자극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가리온을 부르려다 말았다.

가리온도 누트 샤인을 쓰러뜨리기에는 지금이 적당한 시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트 샤인은 이미 스켈리톤 비숍에게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가리온은 누트 샤인을 죽일 수가 없었다.

가리온은 누트 샤인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있었다. 가리온의 조상과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이야기까지. 가리온이 알아야 할 모든 진실들을 누트 샤인은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가리온 자신이 직접 물어볼 수는 없지만, 누트 샤인이 꼭 무언가 말해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가리온과 시에나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누트 샤인은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연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누트 샤인은 돌연 방향을 틀더니 가리온과 시에나를 향해 말했다.

“자네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나?”

가리온과 시에나는 대답하지 않고 누트 샤인만 묵묵히 노려보았다. 누트 샤인은 처음부터 대답 같은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표정으로 고어가 잔뜩 새겨진 벽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게 바로 슈마트라 초이와 듀스 마블이 발견하지 못한 노라크 교도들의 진짜 유물이지.”

가리온과 시에나의 귀가 솔깃해졌다.

“크크크. 누구도 그 누구도 이걸 발견하지 못했어. 오직 나만이 이걸 발견한 것이야. 오직 나만이!”

누트 샤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여기에는 공간을 비트는 곳이 있지. 다른 차원을 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틀어지는 곳이 바로 여기에 있단 말이야.”

“그, 그렇다면, 이계의 오염이 여기서 시작된다는 것인가요?”

시에나가 소리쳤다.

“크크크. 왜? 두렵나? 하긴 너희 인간들은 뭐든지 두려워하지. 크크크. 너무 조급해 하지 마. 이곳은 봉인 중 한 곳에 지나지 않으니.”

“봉…… 인?”

이번엔 가리온이 되물었다.

“그래. 봉인.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앞으로 몇 군데를 더 돌아다녀야 한단 말씀이야. 그리고.”

누트 샤인은 가리온을 뚫어지도록 노려보며 말했다.

“그 전에 자네들과는 작별을 해야겠지.”

누트 샤인은 그렇게 말하고서 벽의 한 부분을 두드렸다. 아니, 누트 샤인의 손은 벽안으로 쑤욱 들어가 있었다.

“그래. 이 곳이야. 조금 있으면 이계의 생물들이 나타날 것이야. 그럴 시간이거든. 이번엔 살아남기 힘들겠군. 어디 한번 끈질기게 버텨보게나. 크크크.”

말을 마친 누트 샤인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가리온과 시에나는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누트 샤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 어떻게…….”

시에나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가리온은 누트 샤인이 사라진 쪽으로 뛰어가 벽을 살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에 푸른 빛이 넘쳐나는 이 방은 모든 것이 똑같을 뿐이었다.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까지도, 자신들이 들어 온 문을 빼면 이곳에는 다른 것이 전혀 없었다.

“도저히 알 수가 없군.”

가리온은 한 숨을 쉬며 돌아섰다. 시에나도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을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시에나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가리온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가리온의 생각은 누트 샤인이 했던 말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이라니. 하지만 아까 그 바기족이 말한 검기는 사실이었어. 모든 것이 알로켄족의 피가 흘러서이기 때문인 걸까.’

시에나는 고개를 숙였다. 가리온과 이런 곳에 단 둘이 있는 것이 어쩐지 부끄럽고 창피했다.

“몸은 다 회복된 모양이군요?”

가리온이 친절하게 물었다.

“아. 조금.”

“아까는 마법도 금방 쓰시던데요.”

“갑자기 놀라면, 순식간에 집중력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어요.”

가리온이 어떻게 나무뿌리에서 풀려 나왔는지 물어보려고 고개를 든 시에나는 놀라 주저 앉아 버렸다.

“저기! 어떻게! 가리온님! 조심하세요!”

가리온도 시에나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벽에서 튀어나온 괴물 하나가 침을 흘리며 가리온의 앞에 떡 하니 서 있었다.

눈이 가늘고 길게 찢어지고 머리가 다소 큰 오크처럼 생긴, 시에나만한 크기의 괴물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가리온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괴물들은 점차 수가 늘어나더니 가리온과 시에나를 둥글게 감싸며 죄어 들어왔다.

가리온은 크루어를 든 손에 힘을 주며 시에나에게 물었다.

“이것들이 뭐죠?”

“우, 우코바치예요.”

“우코바치?”

“네. 그런데, 이건 고대괴수사전에나 나오는 괴물인데.”

“그렇다면 원래 트리에스테 대륙의 것은 아니란 이야기군요.”

“그렇죠. 완벽한 이계의 괴물!”

“아까, 그 바기족의 말이 바로 이것이었나 보군요!”

가리온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우코바치 하나가 뒤에서 가리온을 안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 불을 생성시키려나 봐요! 빨리 떨어지세요!”

시에나의 말을 들은 가리온은 우코바치의 끌어 안은 팔을 풀려고 했지만, 우코바치의 힘이 완강해 쉽게 풀려날 수가 없었다. 가리온이 끙끙대는 사이 우코바치의 몸에 새겨져 있는 문양에서 주황색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문양이 새겨진 곳에서부터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가 가리온의 갑옷을 감싸며 고통을 주었다.

“안되겠군!”

가리온은 풀어나는 것을 그만두고 크루어를 옆으로 돌려 들어 우코바치의 옆구리를 그대로 푹 찔렀다.

키익-.

기분 나쁜 우코바치의 울음소리가 째지더니 몸을 비틀거렸다. 가리온은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찌른 검을 그대로 수평으로 가르면서 돌아섰다.

가리온이 우코바치의 허리를 반쯤 갈라 버리자 우코바치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갈라진 우코바치의 몸에서는 피 대신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검은 연기가 불길하게 느껴진 가리온은 그을음에 탄 고통도 신경 쓰지 않고 시에나를 불렀다.

“시에나! 이리 와요!”
“네!”

시에나가 가리온에게 달려가는 그 순간에도 벽에서 튀어나오는 우코바치들의 수는 배로 늘어났다. 불안해 하는 시에나를 감싸며 가리온이 말했다.

“이계의 괴물이라지만, 별 것 아닐 겁니다.”

시에나는 그런 가리온의 모습이 믿음직스럽기는 했지만, 여전히 두려운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

“조심해야 해요. 우코바치는 불의 마법을 쓰니 일단 제가 냉기마법을 쓰도록 할게요!”

시에나는 아직 완전한 마법을 할 만한 몸 상태가 아니었지만 워낙 긴급한 상황이었다. 시에나는 곧 정신력을 집중해 불덩이를 식힐 아이스 엘리멘터들을 끌어 모았다.

우코바치들은 그 사이 가리온과 시에나에게 무작위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우코바치의 몸뚱이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 빛나더니 우코바치의 몸 전체가 불덩이가 되어 타올랐다.

휘레-.

우코바치들의 저음이 낮게 깔리면서 우코바치들의 온 몸에 불 덩이들이 튀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에나는 서둘러 냉기를 뿜어냈다.

“아이스 스프레드!”

시에나가 응집해낸 아이스 엘리멘터들이 결정을 이루어 날아가 불덩이를 찌르자 둘은 공중에서 만나 물이 되어 비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아직은 역시…….”

“이 정도면 충분해요.”

가리온은 우코바치들이 다시 불을 끌어 모으려는 틈을 이용해 크루어로 우코바치들을 갈랐다. 우코바치들이 또 가리온을 끌어안거나 불을 쏘기 전에 없애버려야 했다. 가리온은 우코바치들에게 잡히기 전에 공격을 해야 했기 때문에 눈코 뜰 새도 없이 사방으로 검을 날렸다. 우코바치의 가슴을 발판으로 삼아 한 놈의 목을 내려 치고, 반대편으로 튕겨 머리부터 반으로 쪼개내었다. 가리온의 검에 쓰러진 우코바치들에게서는 하나같이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그 검은 연기 뒤로 우코바치들은 자꾸만 나타났다. 아니,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시에나가 그 많은 우코바치들을 보며 한 숨을 쉬는 순간, 시에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어쩌면 좋아!”

가리온은 시에나의 말에 잠시 뒤를 돌아 보았다.

“가리온!”

시에나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가리온! 잊고 있었어요! 우리는 빨리 여기서 도망쳐야 해요!”

가리온은 시에나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우코바치의 불덩이 하나가 시에나를 향해 날아왔다.

“앗!”

불덩이는 시에나의 오클라스에 붙었다. 가리온은 서둘러 달려가 시에나의 옷에 붙은 불을 발로 짓밟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시에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우코바치는 문제도 아니예요!"

"예?"

“우코바치! 우코바치가 나타나면!”

“우코바치가 나타나면?”

“우코바치가 나타나면, 틀림없이.”

시에나는 절망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쿤다, 쿤다가 틀림없이!”

순간, 시에나의 검고 긴 머리가 휘날렸다.

가리온이 바람이 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지 않은 쿤다가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모여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