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orak - 이교도의 유물
13장
Heathen

이교도가 걸어간 길

누트 샤인은 노라크 교도들이 만들어 놓은 통로를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크크크……. 아주 잘 되었어. 그 년, 놈들이 거기서 빠져나올 리가 없지…….”

누트 샤인은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금새 험악한 얼굴로 바뀌면서 이를 으드득 갈았다.

“으웨엑, 퉤, 퉤. 빌어먹을 인카르 것들!”

누트 샤인은 찌그러진 표정으로 고서와 벽면을 번갈아 가며 들여다 보았다.

“이제……. 멀지 않았어.”

시에나는 벽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아. 아.”

방금 전까지도 나오지 않던 목소리가 드디어 튀어 나왔다.

상비약을 가지고 다닌 것이 다행이었다. 가리온이 뚫어준 뿌리를 지나 푸른 빛이 눈부신 통로로 들어 온 시에나는 상비약을 먹은 뒤 한 동안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빨리 치료한 후, 가리온을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자신을 치료할 힘마저 없었던 시에나는 그렇게 누워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깨어난 시에나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몸은 상당히 개운해져서, 막혔던 목소리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 남은 상처는 리커버리 엘리멘터로 치료하면 될 것이었다.

“생명의 신 시즈에게 치유의 힘을 빌리니, 엘리멘터들이여 나와 함께 공기와 시간을 넘나들어 그대들의 놀라운 힘을 지금 이곳에 집중케 하라! 리커버리!”

창백해져 있던 시에나의 하얀 얼굴이 치료가 되면서, 옅은 분홍빛을 피우더니 땀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휴-. 마법은 아직 무리인가.”

목소리가 트이기는 했지만, 정신력을 오랫동안 유지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시에나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신 없이 쓰러져 울다가 잠들어서 그런지 어디가 가리온이 있던 곳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긴 온통 파란 빛뿐이잖아. 도대체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거야…….”

순간 시에나의 머리 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파란색 나무 뿌리였지만, 분명 나무 줄기의 흔적이 있을 것이었다.

“그래. 벽을 더듬어보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시에나는 벽면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용암을 차갑게 식히던 광석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벽에는 고어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이런……. 여기에도!”

아니, 잔뜩 정도가 아니라 벽면 전체가 전부 고어였다.

시에나는 불길한 느낌을 주는 고어들을 전부 다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가리온이 얽힌 뿌리에서 빠져 나왔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시에나 자신이 얼마나 오래 잤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한시가 급했다.

아쉬운 마음을 접은 시에나는 조급하게 이곳 저곳을 뛰어 다녔다. 그렇지만 어디를 가도 똑같은 장소만 나타날 뿐이었다.

“아까 왔던 곳 같은데…….”

노라크 교도들의 통로는 꼭 미로 같았다. 사방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벽마다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갈라지는 통로도 여러 곳이었다. 그 덕분에 시에나는 계속해서 헤매며 돌아다녔다. “가리온! 가리온!”

그렇지 않아도 큰 내상을 입은 시에나는 너무 돌아다녀 지쳐버렸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가리온의 목소리가 불쑥 들리는 것 같았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휙-.

시에나는 얼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뒤 돌아 보았다. 하지만 가리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에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환청인가……. 가리온. 어디 있는 거예요…….”



얽힌 뿌리의 힘은 상상한 것 보다 훨씬 더 센 것이었다. 옮아 죄는 거대한 힘에 가리온의 숨은 막힐 대로 막혀 있었다. 가리온은 헉헉거리면서도, 정신을 집중했다. 이대로 여기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가리온은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자신이 제일 존경하던 아버지에게 인정 받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내고 싶었다. 가리온은 그것으로 자신의 지난 어린 시절과 부모님의 사랑을 모두 보상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파이더 퀸과 싸워서 살아남은 이야기, 청기사의 검 크루어를 손에 들게 된 이야기, 스켈리톤 폰을 물리친 이야기 등 할 이야기들이 산더미 같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살아 숨쉴 때 가능한 일이었다. 가리온은 살아서 빠져나갈 것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하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이 검으로…….’

가리온은 문득 처음으로 검을 배우던 때가 생각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가벼운 목검이었지만, 다섯 살의 가리온에게는 작은 목검마저도 천근같이 무거웠었다. 그 때도 끙끙거리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이 검을 들 수가 있지?”
가리온은 그 검을 힘들게 질질 끌고 다니면서, 집에 놀러 온 기사들을 푹푹 찔러보곤 했다. 기사들은 그런 가리온이 귀엽다며 사탕을 하나씩 주었다.

그렇게 검은 가리온의 일부가 되었고, 가리온은 어느 새 목검을 작은 진검으로 바꿔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천애 고아인 것을 알게 되던 날, 그 작은 진검은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와 비슷한 빛을 발하였다.

작은 검 주위에 영롱하게 발하던 검의 열기.

‘그래……. 빛…….’

가리온은 그 날의 기운이 다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가리온이 들고 있던 은 검, 크루어에 하늘색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트 샤인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벽 앞에 섰다.

“드디어 유물의 종착지에 도착한 것인가…….”

노라크 교도들이 하이하프 설원 밑의 동굴로 들어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카르 교단에 쫓겨 그리로 옮긴 것도 아니었다.

사실 노라크 교도들은 인카르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노라크 교도들의 대부분은 그랜드 폴 기간 동안 일어난 대지진 속에서 운 좋게도 땅밑으로 가라앉으면서 살아난 사람들이었다. 땅 밑으로 가라 앉은 인간들은 그 날 지상을 휩쓸었던 검은 연기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상 외의 일로밖에 볼 수 없는 그 상황은 알로켄족의 배신으로 죽음만을 앞둔 인간들에게 구원의 손길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렇게 살아난 사람들은 당연히 이계를 숭배하였다.

그리고 노라크 교도들은 이계의 오염으로 희생된 자들을 당연히 받아 들였다. 온전한 인간의 모습에서 좀 더 강한 다른 객체로 변한 이계의 변형체들은 노라크 교도들에게는 신앙의 결실이요, 믿음의 결정체였다.

그렇게 모인 노라크 교도들은 그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고대의 문서들이 땅 위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구전과 설화를 추적하고 또 추적하여, 이계의 닫혀진 문을 열 수 있는 자료와 방안을 마련해 나갔다.
하지만 뒤늦게 노라크 교도들의 존재를 알게 된 인카르는 대 멸망 ‘그랜드 폴’을 두 번 다시 새기지 않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고, 슈마트라 초이는 노라크 교도들을 무찔러 그 원정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사실 슈마트라 초이의 승리는 반 쪽짜리 승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무렵의 용암은 휴식기였기 때문에 분출될 일도 없었고, 덕분에 숨겨져 있던 노라크 교도들의 진정한 유물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노라크 교도들이 묻혀지는 듯 했었다.

하지만 누트 샤인은 그것이 끝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흔히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힘과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럴 만한 기념비적인 것을 제작하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100년이 넘은 노라크 교도가 그런 것을 제작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누트 샤인의 짐작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고, 그 기념비적인 유물은 드디어 누트 샤인의 앞에 나타났다.

“이것이군. 이교도의 배.”

시에나는 또 다시 모퉁이를 돌고 돌고 또 돌았다. 구불구불한 통로는 도무지 끝이라거나 시작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간신히 회복한 체력도 이제 거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아. 도대체 가리온님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담.”

시에나는 그만 주저 앉아 버렸다. 한참을 걸어서인지 얇은 발목이 몹시 욱신거렸다.

“과연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시에나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노라크 동굴에 들어오면서부터 종잡을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나고 있었다. “듀스 마블님은 아무 것도 모르셨던 걸까…….”

챙-.

근심과 체념이 반쯤 섞인 얼굴로 발목을 주무르고 있던 시에나는 어디로부터 울려오는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칼 소리? 설마……. 가리온?’

시에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방금 전에 가리온을 찾으러 돌아다니던 통로 같았는데 신기하게도 통로의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헉……. 헉…….”

시에나의 앞에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벽이 나타났다. 네 귀퉁이에 방위를 나타내는 고어가 하나씩 적혀 있을 뿐이었다.

“뭐지?”

시에나는 조심스럽게 벽에 귀를 대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여……. 여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