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orak - 이교도의 유물
1장
Blue Feather

인카르의 청기사

: 노라크 동굴로 떠난 가리온, 그리고 그리폰을 타고 아레스 숲으로 날아오는 시에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는데....

스파이더 퀸의 머리에는 화려한 왕관이나 술 같은 것이 잔뜩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슨 모양인가 표현해내기는 어렵다. 자세도 서 있는 것인지 기어 다니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저 설명해보자면, 상체를 조금 세우고 있다는 가정 하에 가슴 부분이나 배 부분쯤 갈고리 같은 팔이 수십 개 다닥다닥 달려있어, 일단 그 팔에 붙잡힌다면 압박만으로도 손쉽게 상대를 박살낼 것만 같아 보이는, 굉장히 위압적인 힘을 가진 괴물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엉덩이 부분에는 반투명한 주머니가 붙어 있는데, 그 반투명한 젤 속에 스파이더 퀸의 알로 보이는 것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또 전체적으로 끈적거리는 것들이 잔뜩 묻어있으면서도 군데군데 숨구멍 같은 구멍이 나 있다.

끈적끈적한 점액질은 외견상 매끈해보여서 닿기 전에는 그것이 끈적거리는지 알기 힘든데 여기에다 까맣다 못해 파랗게 내쏘는 안광은 그 공포감을 두 배로 조성해 주었다. 이런 스파이더 퀸은 칠흑 같은 몸뚱이에 어우러진 화려한 색상과 무늬를 가지고 있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더더욱 괴기스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인카르의 기사단은 이런 스파이더 퀸을, 하필이면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아레스 숲 한 가운데서 만나게 되었다.

다음 날의 진군을 위한 임시 캠프에서 기사단이 스파이더 퀸에게 습격당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경비병들의 초소가 이미 여러 개 부서진 이후였다. 잠에서 부스스 깬 기사들의 어릿어릿한 눈에 비친 스파이더 퀸의 거대한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4미터가 넘는 오염체가 막사를 마구잡이로 쓸어버리는 장면은 쉽게 연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 오염체다!"

"어서 일어나!"

"검, 검이 어디 있지?"

무방비상태였던 기사들이 엉거주춤 일어나 검이나 창을 들고 서둘러 싸울 태세를 갖추자, 스파이더 퀸은 배 부분의 갈고리 같은 팔을 이용해 선제공격을 해 왔다. 팔이라고는 하지만 관절 마디를 제외한 나머지는 가시로 덮여 있어 흡사 날카로운 메이스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 메이스같이 무자비하게 굵은 팔로 기사들을 후려친 스파이더 퀸은, 이어서 끈적이는 액체를 입에서 쏘아대었다.

스파이더 퀸의 거대한 몸만큼이나 점액의 양도 엄청났다. 홍수처럼 쏘아대는 점액을 온 몸에 뒤집어쓴 기사들은 공격은커녕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스파이더도 하는 일반적인 공격이었다. 알을 달고 있는 스파이더 퀸의 더욱 막강한 위력은 바로 쇠를 부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독이 있다는 것이었다.

스파이더 퀸은 바로 그 독가스로 적을 궁지에 몰았다. 설령 독가스에 대한 두려움과 무차별적인 공격을 이겨내고, 스파이더 퀸에게 창이나 검을 찔러 박았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 스파이더 퀸의 녹색 피가 갑옷에 닿자, 그것은 그대로 눌어붙어 갑옷을 부식시켰다. 스파이더 퀸은 그 피마저도 독극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기사들은 그 독액이 자신의 몸에 닿을까 조바심을 내며 점점 뒤로 물러나게 되었고, 싸울 의지도 약해져 버렸다.

이렇게 기사들이 주춤거리는 사이에 스파이더 퀸은 더욱 전진하며 거치적거리던 막사를 짓밟고 걷어차 버렸다.

푸른 인카르 문양의 막사가 서너 개나 남았을까. 신참 기사들의 막사가 막 짓밟히려던 순간, 막사 안에서 예리한 창이 뚫어져 나와 스파이더 퀸의 목을 단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갑작스런 소란에 잠에서 깬 가리온은 막사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건?"

거대한 스파이더 퀸들이 막사는 물론, 기사들을 가차 없이 쓸어버리며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독가스를 뿜어대는 저 괴물은 가리온도 본 적이 있었다. 또 그 괴물을 어떻게 해치워야 좋은지도 잘 알고 있었다. 가리온은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밖에 없었다.

항상 유난히 커 보이던 가리온의 아버지는 인카르의 영웅이었다.

밀교 노라크를 처단한 청기사단의 전설 슈마트라 초이. 그가 바로 가리온의 아버지였다.

슈마트라 초이는 말 그대로 전설이며 영웅이었다. 그 영웅스러움은 강하면서도 빠른 검술 실력에서 자연스레 배어나온 것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청기사단의 다른 기사들과는 또 다른 불가사의한 힘이 있었다.

신비로운 그 힘을 검술의 궁극에 도달한 기사만이 가질 수 있는 고수의 내공이라 생각한 기사들은 슈마트라 초이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검성(劍聖)이라는 칭호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검성 슈마트라 초이를 통해 검술의 최고 경지에 다다르고 싶은 기사들의 욕망은 불길같이 타올랐고 덕분에 가리온의 집에는 항상 기사들이 넘쳐났다. 그래도 슈마트라 초이같은 힘을 쓸 수 있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어린 가리온은 그런 아버지가 엄청나게 거대해보여 두렵기도 했지만, 자신이 검성 슈마트라 초이의 아들이라는 것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슈마트라 초이가 검을 휘두를 때,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한 빛은 언제나 가리온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우리 아버지는 검에서 빛이 나요! 아저씨들은 빛이 나지 않죠?"

"허허, 그래. 그렇구나."

"이 맹랑한 꼬마 녀석아. 너도 검을 쓸 거냐?"

"네, 저도 열심히 수련해서 아버지처럼 검에서 빛을 낼 거예요!"

가리온은 정말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검술 수련을 했다. 그리고 자신도 슈마트라 초이처럼 빛을 내 보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슈마트라 초이는 그런 가리온의 모습을 수없이 보았지만, 검에서 발하는 빛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슈마트라 초이 자신은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빛이 두려웠다.

그 빛이 검술의 단련으로 생긴 궁극적 경지의 산물이 아니고, 고아였던 자신의 비밀스러운 핏줄로부터 전해져 온 사악한 힘이라 믿었던 것이다. 슈마트라 초이는 그 사악한 힘이 가리온에게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슈마트라 초이의 생각과 달리  어느 틈엔가 가리온에게도 그 힘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뒷마당에서 몇 시간째 혼자 검술 훈련에 열을 올리고 있던 중의 일이었다.

검에 열중한 가리온의 반듯한 이마를 타고 내린 땀방울은 칼날 위에 후두둑 떨어졌다. 땀방울이 닿은 검에서는 파지직,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가리온이 잡고 있던 작은 검 주위로 영롱한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가리온은 본능적으로 그 힘이 검 자체에서 흘러나온 것은 아님을 느꼈다. 이미 주위에는 빛을 발하기 위한 에너지들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것들이 검의 열기 속으로 빠져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리온이 검술연습을 하던 밝은 황토빛깔의 익숙한 흙모래에서, 검으로 산뜻 갈라지는 미풍 같은 바람에서, 땅 밑을 곳곳으로 파고드는 시원한 지하수에서, 주위의 모든 자연으로부터 검과 자신을 감싸는 듯한 힘이 모여 들고 있었다. 그 힘은 아직 어린 가리온에게는 버거울 정도로 지나치게 강했다. 감당 못할 정도로 기운이 꽉 차오르자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가리온은 그만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인카르 신전에서 온 손님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멀리서 가리온의 검술 연습을 지켜보던 슈마트라 초이는 가리온이 갑자기 쓰러지는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곧바로 하인들을 불렀다. 해질녘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가리온이 옆에 앉아 있는 슈마트라 초이를 조용히 불렀을 때, 슈마트라 초이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리온은 슈마트라 초이가 불러도 대답이 없자 또박또박 낮의 일을 이야기했다.

"저는 신비로운 힘을 느꼈어요!"

슈마트라 초이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다.

'믿을 수가 없어. 어째서 이 아이에게 이런 힘이 있는 것이지…….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창 밖에는 가리온이 쓰러질 때 떨어뜨린 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작은 검은 붉은 노을에 물들어 빛나고 있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붉게 빛나는 검을 노려보았다.

"다시는 검을 잡지 마라. 이제부터는 창을 들어라."

"네? 하지만 진정한 기사는……."

"기사단은 창으로도 들어갈 수 있다. "
"전 검을 휘두를 수 있어요. 아버지처럼 영웅이 될 수 있다구요!"

창 밖을 바라보던 시선이 가리온을 향하면서 야멸차게 변했다.

"그렇지 않아. 네게 그런 힘이 존재할 리 없어. 잠시 일사병으로 쓰러진 것뿐이다."

가리온을 바라보는 슈마트라 초이의 표정엔 잠깐이나마 애처로움이 스쳐 지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이었다. 슈마트라 초이의 눈빛은 어느 샌가 다시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너는……. 너는 아냐."

슈마트라 초이의 말소리는 어쩐지 긴장하는 듯 가늘게 흔들렸다. 가리온은 그런 슈마트라 초이의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가리온이 알고 있던 검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리온이 이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낮의 그 느낌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싶었던 가리온은 검을 들고 몰래 방 밖을 빠져 나가다가, 무심코 부모님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슈마트라 초이의 목소리는 약간 격양되어 있었다.

"그 아이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을 리 없소."

"왜 그렇게 단정하시죠?"

"디에네. 그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소. 그 앤 내 혈육이 아니오."

"제 아이가 아닌 건 분명하죠. 그렇지만……."

"난 내 핏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렇다면 저 아이는……."

가리온은 뒤로 물러섰다.

'이게……. 무슨……. 내……. 내 얘기인가.'

가리온이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어머니가 자신의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마저 친부가 아니라니!

귓속이 우웅 하고 울었다. 충격으로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몸 전체를 뒤흔드는 것 같았다. 당황해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며 온 몸의 힘이 풀렸다. 손에 들려있던 작은 검도 떨어졌다.
바로 그 때 가리온의 등 뒤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여자의 비명처럼 가늘고 높이 째지는 소리였다.

가리온이 등을 돌리자, 소리를 내는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자기가 항상 우러러 보아왔던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보다 몇 갑절 더 큰 것만 같았다. 괴물의 어마어마한 크기는 작고 어린 가리온에게 일순 엄청난 압박감으로 엄습해왔다.

가리온이 방금 전까지 들은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이야기조차 잊어버릴 만큼 괴물에게 모든 정신을 빼앗겨 버리는 순간, 등 뒤로부터 강한 바람이 몰아쳐왔다.

"우아아아아아-."

이 목소리, 이 위세,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였다.

슈마트라 초이는 검을 비껴들고 괴물을 향해 정신없이 돌진하고 있었다. 가리온은 슈마트라 초이의 기합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본능적으로 검을 집어 들어 뒤를 따랐다.

가리온은 슈마트라 초이를 붙잡고 싶었다. 갑자기 나타난 괴물을 상대하러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슈마트라 초이의 모습은 마치 가리온을 혼자 버려두고 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가리온의 눈에 비친 슈마트라 초이의 뒷모습은 유난히 낯설어 보였다.

"아버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섭게 뛰어가는 슈마트라 초이를 놓치고 싶지 않아 가리온은 연신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갔다.

검성으로 불리는 슈마트라 초이는 가리온의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어린 가리온은 헉헉거리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전력 질주했다.

가리온이 헐떡이는 숨을 턱 밑까지 몰아쉬며 좇아가는 동안, 슈마트라 초이는 벌써 괴물 밑에 서 있었다.

무서운 얼굴이 결연한 표정으로 바뀌며 슈마트라 초이는 검을 바로잡았다. 그는 괴물의 괴성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날렵한 동작으로 슈마트라 초이는 곧장 괴물의 등 뒤로 돌아가더니, 머리 위로 치켜든 검을 휘익 정면으로 내려 갈랐다.

슈마트라 초이가 괴물에게서 잘라낸 것은 가리온이 개울에서 본 적이 있는 개구리 알 같았다. 반투명하게 쌓인 산 같은 덩어리, 그것은 스파이더 퀸의 알이 뭉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 개구리 알 같은 덩어리가 파괴되자, 괴물은 더욱 째지는 소리로 괴성을 질러댔다. 뇌를 후벼대는 듯한, 듣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음색이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그런 소리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좌우로 검을 틀어 한 번 더 휘둘렀다.

괴물과 알 사이를 잘라 낸 부분에서 녹색의 진한 액체가 툭툭 튀어나오며 숲 주위에 번져나가자 나무들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녹색 액체가 닿아 썩어가는 모양을 그저 홀린 채로 바라보던 가리온 쪽으로도 그 액체가 튀어 순식간에 그의 작은 검을 뜨겁게 달구었다. 갑자기 뜨거워진 검에 놀라 가리온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놓치는 사이, 슈마트라 초이는 그 진한 액체를 이리저리 피하면서 괴물의 얼굴 가까이로 달려 들어갔다.

"야아아아- 앗!"

엄청난 기합소리와 함께 하얀 빛이 은검에 모이더니, 괴물의 목을 좌악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잘려나간 목이 땅에 떨어지면서, 고막을 찢는 듯 날카로웠던 괴물의 괴성도 점차 사그라졌다.

슈마트라 초이는 미스릴로 만들어진 은빛 검에 묻은 녹색 액체를 툭툭 털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로 코앞에 괴물의 목이 녹색 액체에 뒤범벅되어 뒹굴고 있는 상황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서 있는 가리온에게 던진 슈마트라 초이의 말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스파이더 퀸은 알부터 없애야 하는 거다."

숲을 나서는 슈마트라 초이를 가리온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말없이 따라갔다. 달빛을 받아 더욱 거대해 보이는 그의 어깨를 뒤에서 바라보는 가리온의 심정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검의 신비한 힘을 발견한 일, 그 힘을 수용하지 못해 자신이 쓰러진 일, 슈마트라 초이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이야기, 알부터 없애야 한다는 스파이더 퀸의 출현, 가리온은 한꺼번에 몰아닥친 일들로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슈마트라 초이가 스파이더 퀸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집 앞에 서 있던 디에네 비노쉬의 손에는 활이 들려 있었다.

활을 본 슈마트라 초이는 불쾌한 얼굴을 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터벅터벅 따라오던 가리온은 우울한 표정의 어머니를 올려보았다. 디에네 비노쉬는 활을 꼭 잡더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리온의 어머니 디에네 비노쉬는 활을 잘 쏘았다. 디에네 비노쉬는 세지타족 출신으로, 명궁 아이리스 비노쉬의 제자이기도 했다.

슈마트라 초이와 결혼하기 전에는 궁사들의 도시에서 궁사를 길러내는 일을 했지만, 지금은 좀처럼 활을 잡지 않았다. 기사의 혈통과 명분을 매우 중요시한 슈마트라 초이는 자신의 아내가 활을 잡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슈마트라 초이가 집을 비울 때면, 디에네 비노쉬는 종종 활을 메고 사냥을 나가 사냥감을 한껏 잡아왔다. 흡족하게 잡은 포획물은 항상 풍성한 잔치로 이어졌다. 물론, 슈마트라 초이가 집에 없을 때였다.

가리온은 디에네 비노쉬의 활 쏘는 모습을 언제나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활시위를 당길 때면 가슴 깊이 숨을 한 번 고르고, 고개를 몸과 일직선이 되도록 곧게 세운 후, 두 눈을 내리 감았다. 두 눈은 감은 채 다시 한 번 숨을 고르고 활시위를 경쾌하게 튕기면, 곧게 편 몸에서 이어져 나간 듯 화살은 탄력을 받아 쏜살같이 날아갔다.

어린 가리온의 맑은 눈동자에 눈을 감은 어머니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고, 심오해 보이는 느낌까지 주었다. 이렇게 잠시 정지된 듯한 순간이 지나면 멀리 있던 사냥감은 어느 새 쓰러져 있었다.

가리온은 그 광경에 취한 듯 홀려들었다. 가리온은 눈을 감고 활을 쏘는 어머니의 모습은 분명 여신의 자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눈을 감아도 사냥감이 보이세요?"

사냥감을 쓰러뜨린 어머니에게 가리온이 조심스레 다가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을 때, 디에네 비노쉬는 한동안 가리온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래……. 꼭……. 너만 했었지. 지금도……. 너만 할 거야. 꼭 너처럼……. 예쁜 눈동자를 지녔었는데……."

디에네 비노쉬의 손이 가리온의 얼굴 가까이 가더니, 순간 멈칫했다. 가리온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머니란 이런 것 일까?'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디에네 비노쉬가 가리온에게 그렇게 따뜻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일은 두 번 다시없었다. 가끔이라도 가리온의 눈을 바라보는 일조차도 없었다.

그래도 디에네 비노쉬는 가리온에게 슈마트라 초이를 대신해 종종 사냥감에 대해 알려 주었다. 몇 차례 사냥길에 따라나섰다가 처음으로 스파이더를 죽이게 되었을 때, 디에네 비노쉬는 가리온에게 말했다.

"스파이더는 평소에는 느려도 일단 전투를 시작하면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때문에 상대하기 쉬운 상대는 아니지. 시야가 넓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거미줄에 한번 걸리면 헤어 나오기가 어려워. 게다가 독성도 있어서, 한번 치명타를 입으면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 그러니까 우선 두 번째 발의 힘을 못 쓰게 하는 게 좋지. 스파이더 엉덩이에서 하얀 액체가 나온다 싶으면 그걸 피해야 해. 그게 바로 끈적이거든……. 이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게 스파이더 퀸이야. 스파이더 퀸은 알집을 끌고 다녀. 스파이더 소울이 지켜주기도 하고……. 먼저 알집부터 공격해야 해. 알이 깨어나면 상당히 골치 아파. 그 안에서 스파이더 퀸이 셀 수 없이 부화한단 말야. 그러니까 알집부터 공격해야 해. 그러면 알집을 잃어버린 어미가 흥분해서 뒤를 돌아볼 수 없게 되거든……. 그 때는 허점이 많이 생겨……. 새끼를 미끼로 해서 어미를 죽이는 거야……. 잔인하지……."

가리온은 디에네 비노쉬의 눈가에 맺혀 반짝이는 눈물방울을 본 듯 느껴졌지만, 어머니의 등 뒤로부터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셔 자세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가리온은 어머니의 그런 모습에 어쩐지 서글퍼져 목이 메어 올랐다.

막사 밖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스파이더 퀸과 기사들의 비명소리는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가리온은 호흡을 가다듬고 벌떡 일어나 자신의 창을 찾아 들었다. 막사 한 쪽은 벌써 녹색 액체로 물들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는 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가리온은 단단히 잡고 있던 창을 막사 천을 향해 힘껏 찔러 박았다. 무턱대고 찌른 셈이었으나 어디를 맞췄는지 곧 알 수 있었다. 막사의 천이 스파이더 퀸의 녹색 피로 녹으면서 창이 목에 깊숙이 꽂힌 스파이더 퀸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가리온이 찌른 창은 다시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창이 박힌 부분에서는 계속 진한 녹색 액체가 솟구치고 있었다. "알부터……. 알부터 잡아야 해……."

이미 꽂힌 창을 다시 뽑아 공격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얼른 옆에 있던 다른 창을 집었다. 그 창으로 슈마트라 초이가 했던 것처럼 거대한 알집을 어미에게서 떼어 놓으려 찌르고 때렸지만, 창이라 그런지 여의치 않자 마음이 급해진 가리온은 알 하나하나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성가신 날파리처럼 옆에서 훼방을 놓아대는 스파이더 소울에게는 창을 흔들어 떨치니 곧 떨어져 나갔다.

가리온이 찌른 알이 터지면서 노란색 용액이 흘러나와 반투명한 알집 속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알집이 아직 어미에게 이어져 있었기 때문인지, 스파이더 퀸은 다른 기사들을 상대하는데 열중해 있었다.

인카르의 기사들은 가리온과 달리 스파이더 퀸을 직접 베어 쓰러뜨리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괴물이 워낙 거구인데다가 스파이더 소울이 옆에서 방해를 하는 통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청기사들의 검이 양날이라 자칫 자기편을 죽이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던 것이었다. 게다가 검이라도 써보려고 하면, 녹색 피에 부식되어버려 공격 자체가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무기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기사들은 스파이더 퀸의 거대한 앞다리에 밀려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고, 스파이더 퀸은 그 위를 사정없이 밟고 지나갔다. 스파이더 퀸에 밟힌 기사들의 몸뚱이는 뼈가 튀며 우두둑 소리를 냈다. 쓰러진 청기사들의 몸에 끔찍한 구멍이 뻥뻥 뚫렸다.

절묘하게 창을 휘두르던 가리온은 가까스로 알을 제거하고 훌쩍 스파이더 퀸의 등을 타고 올라가 온 몸의 무게를 실은 창으로 정수리를 찍어 눌렀다. 높다란 괴물의 등에서 창을 꽂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의 짙은 눈썹 아래 푸른 눈동자에는 광활한 아레스 숲이 비쳐들었다.

두 개의 둥근 달 미세리아와 리케츠가 떠 있는 별이 총총한 아레스 숲의 밤하늘 아래, 수 백 마리의 스파이더 퀸이 한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가리온은 스파이더 퀸이 떼를 지어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저 멀리, 횃불이 타오르고 있는 브라이켄 성이 보였다. 오늘 밤에도 이계의 오염체들과 싸우느라 브라이켄 성은 아직도 잠들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대로 가면 브라이켄 성이 위험해진다!'

가리온은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무리가 엄청난 숫자로 밀고 내려오고 있었다.

'이 많은 것들을 언제 다……!'

한 밤의 냉기 같은 차가운 두려움이 등골을 엄습해왔다. 지금 싸우고 있는 기사단으로 이 상황을 버텨내기란 말 그대로 무리였다. 이미 기습으로 기사단의 절반이 아무런 힘도 써 보지 못한 채 무너진 터라, 숫자상으로도 절대적 약세였다.

"으아아아……."

가리온의 옆에 있던 기사의 얼굴에 스파이더 퀸의 녹색 액체가 튀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흉측하게 녹아내리며 순식간에 뼈가 드러났다. 흘러내리는 허연 뇌수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역시 스파이더 퀸은 이것이 문제였다. 죽인다 하더라도 곱게 죽지 않았다. 알을 먼저 없애 번식을 막았다 하더라도, 스파이더 퀸은 녹색 액체의 흔적을 튀겨 치명타를 입혔다. 덕분에 스파이더 퀸을 상대로 싸우는 기사들의 머릿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놈의 피를 조심해!"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거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스파이더 퀸은 꾸역꾸역 브라이켄 성 방향으로 밀고 내려왔다.

가리온은 방금 죽인 스파이더 퀸의 등에서 다른 스파이더 퀸의 등으로 풀쩍 건너 뛰어오른 뒤, 정신없이 계속 창으로 알을 찌르고 쑤셔댔다. 어느 새 스파이더 퀸은 가리온의 주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가리온은 이 괴물의 등에서 저 놈으로 옮겨 타며 점점 무뎌져 가는 창을 깊숙이 눌러 박고 빼는 것을 반복했다.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가리온은 창과 자신의 몸이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레스 숲에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다. 처참하게 구멍이 뚫린 기사들의 시체 사이로 바닥에 녹색 피가 흥건히 고여, 이제는 땅을 밟을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스파이더 퀸을 타고 다녀야지, 자칫 땅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녹색 피에 그대로 썩어버릴 것만 같았다.

찌르고 또 찌를수록 검푸른 밤하늘에서는 별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스파이더 퀸을 타고 날아다니는 가리온의 모습은 점차 익숙한 자연스러움으로 바뀌었고, 심지어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은빛 구름인 듯, 한 마리 페가수스인듯 눈부시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봐, 저 녀석……. 꼭……. 꼭 슈마트라 초이 같아……."

"그런거 상관하지 말고, 어서 저 놈이나 베어 버려! 겨우 창을 쓰는 녀석에게 신경 쓰는 것보다, 우선 살아야 하지 않겠어?"

"아니……. 저것 봐……. 창끝에서 이상한 빛이 나오는 것 같아……." "조심해!"

스파이더 퀸은 은빛으로 빛나는 가리온의 창을 멍하니 바라보던 기사를 단번에 짓눌러 뭉개버렸다.

부유스름하게 비쳐드는 새벽빛에 저 멀리 하늘 한쪽이 차츰 환해지기 시작했다. 기사단의 몸뚱아리도 하나씩 쓰러져 갔다.

그들은 끊임없는 스파이더 퀸 무리에 질려버렸다. 밝아오는 햇살과 반대로 오히려 진이 다 빠져 버린 기사단은 그대로 포기하는 듯 했다. 그러나 가리온은 이 싸움에 끝이 보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의 눈앞에 살아 있는 스파이더 퀸은 별로 남지 않았다. 이것은 스파이더 퀸의 공격 특성이 절묘하게 빚어낸 결과였다. 스파이더 퀸이 기사들에게 쏘았던 독가스가 오히려 다른 스파이더 퀸과 알들을 죽인 것이다. 결국 자기들끼리 죽인 셈이 되었다.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마리의 알집을 뚫어내고 껍질을 창으로 뚫어 박은 뒤, 가리온은 맥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가리온은 스파이더 퀸의 등에 걸터앉아 자신의 모습을 새삼 훑어보았다. 독가스, 알집, 노란 액체, 녹색 액체 등이 엉망으로 뒤섞여 갑옷에 새겨져 있던 기사단의 자랑스러운 표식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대신에 알 수 없는 문양이 새로 그려져 있었다.

'알집의 노란 액체가 녹색 피를 방어해주나 보군.'

망가진 건 갑옷만이 아니었다. 슈마트라가 집 근처의 숲에서 스파이더 퀸을 잡던 그 날 검을 놓친 이후로 가리온을 지켜 주던 창도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밤새 수많은 스파이더 퀸, 그리고 알의 두꺼운 껍질을 뚫어내던 누군가의 날카로웠던 창의 날 끝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 있었고, 창대는 손으로 잡았던 부분을 제외하고는 갑옷과 마찬가지로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가리온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이 창이 용하게 버텨주었네…….'

가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살아 있는 듯한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사실 사람을 찾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다. 스파이더 퀸의 거구가 땅을 덮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인간인지 어떻게 알아본단 말인가. 그래도 어딘가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혹시나 하는 희망에 가리온은 반나절 이상을 찾아 헤맸다.

정오가 되자 해는 하늘 가운데 높직이 걸렸다. 강렬하게 내쏘는 햇빛에 가리온은 눈앞이 맴돌며 정신이 까무룩 해짐을 느꼈다.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스파이더 퀸들을 상대로 싸우고서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도 못한 채 뜨거운 햇빛 아래 서게 되자 현기증이 일어난 것이었다. 머리를 힘껏 흔들며 겨우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 멀리 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가리온은 남은 힘을 쥐어짜내 다리에 모으며 서둘러 뛰어갔다. 스파이더 퀸을 10마리 정도 넘어 가니, 빛나던 물체가 확연히 보였다. 그 옆에는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그 사람의 머리에는 아직 투구가 벗겨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투구에 달린 깃털은 스파이더 퀸의 공격으로 군데군데가 얼룩지고 뭉쳐져 있었지만, 가리온은 그것이 원래 파란색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슈마트라 초이가 기사단에 속해 있던 시절, 슈마트라 초이는 그 파란색 깃털이 달려 있는 투구를 쓰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 가리온은 혼자서 몰래 아버지의 투구를 써보았다.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의 소유물에 몰래 손을 대는 일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숨을 조용히 멈추어도 손끝이 바르르 떨릴 정도로 긴장되는 것이었지만, 어린 가리온은 그 투구를 보며 자신의 미래를 다짐했다.

"나도 커서 아버지처럼 청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될 거야!"

가리온은 쓰러져 있는 몸뚱이를 가만히 돌려 보았다. 스파이더 퀸의 피가 얼굴에 뭉개져 있기는 했지만, 이번 출전한 기사단의 단장이 틀림없었다.

파란 깃털의 투구 아래 눈을 감은 얼굴은 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한 손에는 은빛 검이 그대로 꽉 쥐어져 있었다.

한눈에도 알아 볼 수 있는 손잡이의 문양, 그것은 인카르에서 대대로 기사단장에게 주었던 바로 그 문양이었다.

이것은 운명이다.

가리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파란 깃털이 달린 투구를 쓰며 기사단장을 흉내 내던 시절부터 그렇게 느꼈고, 또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청기사단장의 죽음은 인카르와 피로써 맹세한 기사의 검 크루어의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크루어의 맹세 아래 싸우던 기사들의 목숨은 밤부터 새벽까지 차례로 사라져갔고, 드넓은 아레스 숲에서 밤새 싸워 살아남은 것은 가리온 단 한 사람, 오직 자신뿐이었다.

가리온은 들고 있던 창을 스파이더 퀸의 두꺼운 등에 내리꽂고, 은빛 크루어를 잡았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검술 연습을 했던 무더웠던 오후의 그 느낌이 생생하게 온 몸 구석구석을 타고 흘렀다.

누가 자신의 친부모이고, 슈마트라 초이가 왜 자신을 길렀던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가리온 자신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인카르의 진정한 기사였다. 몇 차례고 검을 휘둘러보면서 가리온은 스스로가 차츰 당당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이 길이 자신의 운명임을 뼈 속 깊이 새겼다.

'나는 트리에스테 대륙의 영웅, 슈마트라 초이의 아들이자, 인카르의 청기사다!'